롬 11:13-16 버림과 받아들임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말을 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구원되고야 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비록 믿음에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버림받았다고 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패했고 그래서 멸망을 당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가정을 한다면 이스라엘은 결국 자기들의 행위가 기준 되어서 버림받은 결과가 되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유명무실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비록 믿음에 있어서 실패했지만 그들 중에도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될 것임을 말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사도 바울이나, 사마리아 우물가의 남편 다섯 있는 여인이나 창녀나 세리나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나 똑같은 사람, 즉 죄인으로 취급을 합니다. 아무리 그 행동이 선하고 존경받을만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무능하고 약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오셨고 그분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 싫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창녀 세리나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결국 그동안 구원받은 자라는 우월의식 속에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여겨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조건은 자신들의 노력과 자질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율법에 대해서는 성실했지만 실패한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보여주고 있는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 실패한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절기나 제사 할례나 의식 모든 것에 대해서도 실패했습니다. 비록 지키고 실천하는 것에는 성공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의식들이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발견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13-14절에 보면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사도라는 뜻입니다. 오직 이방인에게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사도라는 뜻입니까?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은 인종을 구분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즉 인종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으로 구분을 하고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방인이란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방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을 자신 있게 내어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처럼 할례를 한 것도 아니고,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고, 율법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고, 기도도 십일조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기 행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복음이 향해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복음이 누구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가 어떤 사람을 향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누구를 향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의가 누구를 향한다고 생각합니까?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을 향해 있습니까?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향해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많이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향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닌 민족을 향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을 의가 전혀 없는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직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내 놓을 것이 전혀 없는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통해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자들이고 이방인은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선택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밖에 있었다는 뜻이고 선택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있다고 여겼던 이스라엘이 구원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구원은 이방인에게 넘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누구를 향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간 것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자가 구원을 얻었다면 그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행위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실패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은 자신의 것을 내놓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선포되어지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희를 버리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뜻인데 실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의를 주장하는 그 이스라엘이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의와 행위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서 무엇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가를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함과 의를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그 버림받은 현장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의 행함과 의를 버리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현장에서 나의 모든 의와 선행도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음의 의미를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5절을 보면 버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림은 받아들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받아들임은 누구에게 해당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내어버린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게 된 자에게 받아들임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것은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음을 통해서 나 자신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룰 그 어떤 의도 없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버림받은 자를 받아들이시는 은혜이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버림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받아들이심을 통해서 새롭게 살아난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죽음에서 벗어난 참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이러한 성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버릴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공로나 의라는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버리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놓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버리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헌금을 생각한다면 헌금을 흩어버리는 행위입니다. 돈을 흩어버림으로서 나에게는 돈보다는 그리스도의 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분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서로 보여야 하는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놓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서 남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버림받은 자를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남기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버림의 경험과 받아들임의 깨달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버림받은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까? 이 감격과 감사를 서로 나누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