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16-21 돌감람나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 있어서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버리시고 대신 이방인을 택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하셨는데 이스라엘이 믿음에 실패하자 대신 이방인을 구원의 자리에 집어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생각은 구원의 원칙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경의 기준에 대해 벗어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대신 이방인을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해도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시 이스라엘처럼 실패하지 않을까 염려를 해야 하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이 됩니다. 즉 내게 주어진 구원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믿음에 실패하지 말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전하고 지키는 것을 우리들의 몫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누구에게서부터 누구에게로 넘어갔는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누가 구원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구원이 주어진 자는 어떤 자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거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우쭐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16절에 보면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란 맏물로 바쳐진 곡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질 것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것이나 거룩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오직 처음의 것만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것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맏물이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민 15:18-2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나의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같이 들어 드리라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고 말합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을 거제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아무 곡식으로 만든 떡이 아니라 오직 처음 익은 곡식가루로 만든 떡을 거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떡덩이가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되는 것은, 떡덩이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처음 익은 곡식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맏물로 인해서 떡덩이가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는 말씀역시 같습니다. 가지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뿌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자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스라엘을 잘라내고 대신 이방인을 붙였다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잘라냈고 대신 누구를 붙였는가를 말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자를 향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접붙임이 되어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다는 것은, 애당초 구원에는 해당도 되지 않았던 이방인을 이스라엘 대신 택해서 구원 얻도록 한 것이니까 까불지 말라는 의도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린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 대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이스라엘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이방인은 하나님 밖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대신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방인의 구원 역시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택해서 일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도구로 삼아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이스라엘에 행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스라엘의 실패를 들어서 이방인인 로마 성도들에게 '너희들도 이같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실패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긍하는 것입니다.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가지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원래 참감람나무에 붙어있던 가지, 즉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습니까? 자긍했습니다. 이방인을 향하여 자긍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 택한 받은 자신들은 거룩한 선민이고 이방인은 택함 받지 못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애당초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였다면,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된 것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우리를 살린 어린양의 희생 때문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었습니다. 만약 자신들도 죽어야 할 자였는데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방인을 향해서 자긍한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대신 접붙임을 당해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된 것이 이방인인데, 이방인에게 과연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긍한 마음을 가질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만약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까불더니 잘됐다. 너희들은 믿음에 실패했지만 그래서 버림받았지만 대신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자긍한다면, 그들 역시 믿음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똑같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21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도 버리셨는데 하물며 너희라고 해서 버리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꺾이움 받는 것은 무엇이고 세움을 입는 것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믿음의 자질이 좋아서도 아니라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따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맏물입니다. 뿌리입니다. 우리가 맏물이 아니고 뿌리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맏물이시고 뿌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서 거룩한 떡덩이로 취급받는 것이고, 그분으로 인해서 보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애를 쓰고 우리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보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꺾이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열심히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려고 애를 썼던 이스라엘도 꺾이움을 당했는데 하물며 이방인인 우리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까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자란 나를 거룩하게 하신 거룩의 원천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서 멸망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알게 되고 믿게 되어진 것이 모두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자신 스스로 뭔가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인이었으면 우리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실패는 얼마든지 우리들의 실패와 동일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이 무엇으로 되어진 것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지금까지 우리를 보전케 하신 그분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