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 말씀대로 다 이루신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이 속에서 살아 계신데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으며 또 말씀을 외면해 버린 삶을 살면서도 태연해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신자라면 언제나 자신의 삶이 말씀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입으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신자의 표가 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자신은 모든 예배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부지런히 새벽기도에 나오면서 기도를 하는 것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실된 믿음은 삶에서 하나하나 드러나는 법입니다.
삶과 믿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죽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처럼 신자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면 운동력이 있으며 믿음 자체가 능력이 되어서 그 사람을 움직이고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삶을 통해서 하나하나 증거 되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엄위라는 것은 '잘라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위는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잘라냄을 받게 되고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면 그 인자가 그에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는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자들이었는데 꺾이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뿌리가 그들을 보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스스로 자기들을 보전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죄인 됨을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오히려 핍박을 했으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꺾어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엄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잘라내셨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엄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높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였다면 결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거나 높은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한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하심에 거하고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 증거가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를 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의 용서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용서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인자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자하심에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다'는 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알고 하나님의 용서받음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자하심에 거하는 자에게서 나올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자한 얼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물과 악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피로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백성 삼으신 그 인자하심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용서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인해서 살아났음을 잊지 않습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라는 것,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누구를 대하든 '나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데 내가 누구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주님의 사랑을 입은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인자하심에 날마다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할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살아간다'는 고백으로 살아간다면 분명 그로부터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인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대하든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악한 자입니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서 자기 자랑의 말이 나오겠으며, 형제를 무시하는 말이 나오겠으며, 다툼과 시기와 멸시의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악한 자, 나보다 못한 자, 부자된자 등을 세워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심에 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삶에서 확인되어집니다.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은 분명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거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다툼이나 경쟁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찍힌 바 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엄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찍었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를 토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의 행위가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찍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자에 거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찍어 버리신 엄위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엄위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을 때 찍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설마 수십년 교회 나오고 수십년 동안 새벽마다 기도한 나를 버리시겠는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전혀 모르는 무지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산 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인자에 거하는 자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십니다. 그들이 설사 찍힘을 받은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롬 11:23절에 보면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능력과 열심으로 접붙여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붙임을 받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우리더러 인자에 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붙임을 받은 신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입니까?'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위를 알고 인자를 안다면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와 다툰다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이 인자하심에 거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분명 회개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자하심에 거하지 못하는 것은 찍힌바 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과연 교회를 찾아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신자에게서만 사랑이 나옵니다. 그에게서만 겸손이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온유와 인내와 절제와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서는 무엇이 나옵니까?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으로서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고 살아가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애초에 죽을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죽을 자가 많이 배우고 자식이 성공하고 돈이 많다고 해서 뭐합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까? 신자로 부름 받은 신자는 오직 나를 살리는 참된 생명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보이려고 하지 마시고 하늘에 속한 것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나타내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진다면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높은 마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습니다. 그 엄위는 높은 마음을 찍어 버릴 것입니다. 높은 마음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마음은 인자에 거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자에 지나지 않은 악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사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입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시고, 그 인자가 드러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면서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마음껏 보이며 살아가는 삶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