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25-27 죄를 없이함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거하자'는 이 말이 어려운 말 같습니까 쉬운 말 같습니까? 아마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고 긍휼이지 않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피로 인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고 긍휼하심이라는 말을 한두번 들은 것이 아니고, 또 스스로도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하심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거한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쉽게 느껴지는 인자와 긍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만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와 긍휼 하심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되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 하심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자와 긍휼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쪽에 있는 뭔가를 잘라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말씀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유익 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이 스스로 말씀을 거부하는 쪽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와 결단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기 가능성을 갖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 하심에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자기를 맡기려고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 다운 모습을 자신 스스로 가꾸어 가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자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자신들의 의지와 결단으로 자기 믿음을 지키어 갔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높은 마음으로 보시고 그들을 잘라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였던 이방인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것은 항상 하나님을 찾았던 자들은 자르시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던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자하심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오직 은혜에만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고,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발상은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죄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와 결단이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서 죄로부터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서 죄를 이기고 죄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가령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분노를 발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분노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를 내지 않았을 때 '내가 죄를 이겼다'라고 생각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만약 화를 내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화를 내다니' 하면서 자신의 의지가 약하고 믿음이 적은 것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믿음 좋음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높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6-27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인해서입니까?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 59: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말합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는데 야곱 중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구속자가 임하는 자가 되려거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로 들려집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자가 되려거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구할 수 없고, 죄에서 떠나지를 못하면서 구원 얻기를 바랄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신의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내가 뭔가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고 묻자 누구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죄를 떠난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죄를 떠나지 못한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상식이 잘못된 것임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죄를 떠난다는 것은 우리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즉 죄라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와 결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에서 말하는 죄과를 떠난 자에게 구속자가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다. 이것은 구속자로 오신 분이 우리의 죄까지 모두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속자로 오신 분이 야곱에게 있는 경건치 않은 것을 없애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없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구속자로 오신 분이 죄를 없이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한 자신들의 의지와 결단으로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시비를 거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음으로서 더러움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러운 자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심으로서 바리새인들이 깨끗한 자로 살기 위한 노력이 모두 헛된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은 스스로 죄를 멀리 하면 구원을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를 없이 해주시는 구속자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없이 해주시는 구속자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이 언약이 주님을 믿는 자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신 구속자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없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 자체가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없는자로 여김 받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끗한 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없다함을 선언 받는 것이고 깨끗하다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행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미심쩍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되느냐는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도 죄에 대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결과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해도 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 죄에서 해방시켜주신 구속자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죄는 예수님이 다 책임졌으니까 마음대로 죄지으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네 죄를 다 담당하셨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의로운 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없이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어디에서건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의 비밀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비밀을 하게 되면 스스로 지혜 있다는 것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속자가 우리의 죄를 없이함으로서 죄없다 함을 여김 받고 구원받는 자 된다'는 비밀을 안다면 구원에 대해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의지와 행함으로도 얼마든지 구원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도 이러한 어리석음에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죄없이 함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스스로 죄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헌금을 함으로서 자신이 죄에서 멀어진 것으로 착각을 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것으로 죄와 상관이 없이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기도를 함으로서 구원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떤 행위도 우리를 죄에서 의의 자리로 옮겨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하신 일만 의로 여기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의로우신 일에만 감사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저주에 있어야 할 자를 죄없이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래서 신자는 피흘리신 주님 앞에서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귀하신 자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 놓으셨는데 무엇을 또 요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신자는 다만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