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28-32 사랑을 입은 자

'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을 한다면 과연 몇몇 사람이 그 말을 인정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인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은석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벌컥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때문에 은석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으로서 은석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임에 포함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은석교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얼핏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모인 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비상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교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대한 얘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임이 증거 되었지만 하나님의 택하심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조상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 됨과 동시에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란 하나님 앞에서 원수된 자로 서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도적으로 원수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 모든 행동은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된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그들이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교회의 정당함이 시작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에 대해서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옳음과 정당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자는 내가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되어지는 그 자리에 교회의 정당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보통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의 옳음을 찾아갑니다. 더욱 더 하나님의 교회다운 모습으로 굳게 서기 위해서 많은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깨끗한 옷을 지어 입음으로서 교회로서의 정당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다'라고 한다면 곱게 그 말을 인정하겠습니까?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원수라고 운운한 것 자체를 가지고도 교회를 무시한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한 것이라고 하면서 분노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하나님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교회, 즉 내 자신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한 분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라는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행함을 거부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행함을 구원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너희들의 행함으로 의가 쌓이고 그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 접붙임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드러난 현장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같은 행함이 전혀 없는 이방인을 부르셔서 행함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라는 것은 은혜 앞에서 인간의 행함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앞에서의 이스라엘이고 그들의 원수 됨이 이방인이 부르심을 입음으로서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8절 뒤에 보면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즉 복음으로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끝나지만 택하심으로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원수된 그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조상으로 인해서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된 자가 약속으로 인해서 사랑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28절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을 아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자신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자신이 원수임을 알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되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을만하다고 여겨버린다면 결국 의가 되는 것은 그들의 행위일 뿐입니다.

교회란 위선과 가식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자로 서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하고 경건한 모습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원수된 모습이 가려진 곳에는 사랑도 가려지고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복음의 적일 뿐이지 복음을 도와주고 복음 편에 서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랑이며 은총일 뿐입니다.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불러 놓고 후회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택하셨는데 그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해서 취소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에는 포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름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치 않는다고 해도 그 부름은 포기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뜬다면 그것은 자신이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처럼 은혜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인정하는 곳에서 넘치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에게 순종합시다'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이 지켜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긍휼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순종하고 있는데 무슨 긍휼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에 대해서 단지 원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자'라고 한다면 스스로 원수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아들의 자리로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말씀에 완벽히 순종하신 것은 그 누구도 순종하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순종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순종치 않은 인간이며 원수임을 깨닫고 우리 대신 순종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눈이 뜨인 자들입니다. 순종치 않았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입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신자이며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