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1-2 권하노니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권한다'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권한다는 것은 부탁한다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훈계의 의미가 강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 다가오겠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은 항상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하는 위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권한다는 것은 훈계의 위치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권위가 있다는 것이지 사람인 사도 바울이 권위가 있어서 훈계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점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이란 인간을 사용하여 전달되어집니다. 10:14절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전파하는 자를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들은 자가 있게 되고 들음으로서 믿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이 인간에 의해서 전파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나에게 전파되어진 말씀이지 말씀을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전파할 자를 부르시고 보내셨다면 그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꼭 목사이고 장로이며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겠습니까? 이점이 바로 오늘날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의 허물에 대해서 마음놓고 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설사 권했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 불화로 끝나게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꼭 목사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라도 말씀을 깨달은 성도는 말씀과 어긋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형제에 대해서는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말씀을 전파하는 도구로 세우셨고, 또 훈계의 권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단지 말씀을 옮기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권면을 할 때 말씀이 나의 허물을 지적하고 훈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나를 훈계하고 있다'고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권위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권위를 부여받는 목사는 나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목사의 말에 대해서는 순종하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훈계할 때는 참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석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권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다른 형제에게서 말씀에서 벗어난 모습을 발견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마음속으로만 '그것은 잘못된 것인데'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다운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괜히 말을 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 홀로 성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 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사신다면 말씀에서 멀어진 형제의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교회라면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형제의 허물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버립니까? 왜 권하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말씀이 권위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형제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말씀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형제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말씀으로 권할 때 그 사람이 누군가를 봐서는 안됩니다. 그가 과연 나에게 충고하고 훈계하고 가르칠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입에서 전파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사람은 잊어버리고 오직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때 말씀의 권위에 복종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권한다는 것은 나는 잘하고 너는 못한다는 차원에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설사 그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말씀 앞에서는 허물 많은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말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말씀을 설교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목사가 먼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허물을 발견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목사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허물을 책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교인들의 허물을 책망하고 판단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 많은 분을 훈계하고 권한다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꼭 목사를 통해서 전파되고 가르쳐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 역시 그렇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말을 듣고 있고 또 목사인 저를 통해서 설교를 듣기 때문에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어린아이가 나와서 여러분에게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목사인 제가 이 말을 할 때하고 어린아이가 할 때하고 말씀이 달라지거나 권위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누가 전파하고 가르치던 말씀은 변함 없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반응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본문을 가지고 시골교회의 젊은 목사가 많은 목사들 앞에서 설교하기를 '우리가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가 예배가 아닙니다'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 감히 예배를 부정하느냐?'라고 하면서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총회장이 그렇게 설교를 한다면 그냥 수긍을 하고 지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권위에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근거해서 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권고를 듣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자의 바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신자를 친히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권고란 하나님의 자비를 제시하는 것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자신이 나무라거나 책망하거나 심판하고 판단하기 위한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비하심이 권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로서 심판을 받아 멸망에 처해져야 마땅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로 말미암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권고를 받으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권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를 권고한다면 우리는 그 권고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허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물조차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위에서 우리를 권고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목사는 여러분과 같은 위치에서 다만 말씀을 전달할 뿐입니다. 만약 목사가 자신을 높은 위치에 두고 아래를 향해서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정열적이고 힘있는 설교를 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인간의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말씀을 가지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신자를 사용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면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교회에서 서로 권하는 것을 삼갈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말씀을 보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보고도 못본척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권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권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떠하며 긍휼이 어떠한가를 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은 자기 백성을 찾을 것이고 자기 백성을 권할 것입니다. 따라서 권면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린 다만 사용되어졌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