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1-2 영적 예배

인간의 종교는 신 앞에 나와서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신의 도움과 보호하심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화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이고 알 수 없는 앞날의 불안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신을 섬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을 경배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교의 예배는 예배라는 자기 행위를 징검다리로 해서 신을 만나고 신과 자신들의 연결 고리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즉 예배를 드림으로서 자신은 신에게 가까이 나아가 있으며 신을 믿고 섬기는 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고,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는 신을 향한 믿음이 매우 특심한 신앙인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든 예배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의식 자체가 문제입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사고방식처럼 예배를 징검다리로 해서 신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를 신앙의 근거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예배 자체에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순서를 어떻게 정하면 좀 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기어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에는 하나님도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요즘에는 예배를 교회 부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가운데 소위 '열린 예배'에 관심을 두는 자들도 많습니다. 옛날처럼 경직되고 조용한 분위기의 예배에서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배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교회 부흥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연관된 것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느냐?'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과연 그러한 것입니까? 인간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예배'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영적 예배라는 것이 뭔가 이성적인 것이고 우리의 정성을 요구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선 영적이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즉 우리의 몸과는 상관이 없는 성실이나 진심, 이러한 것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예배가 우리 몸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예배는 진실함이나 성실함으로서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정성과 진실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바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우리들의 몸이 하나님에게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예배라고 해서 주일에 모여서 몸으로 드리는 예배와는 별개의 예배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많은 교인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적당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신자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현실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제사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위치에 굳건히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조건이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의 기둥으로 존재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 누구라도 흠집을 내고자 할 때는 결단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영적 예배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음이라는 명목하에 제사와 십일조, 그리고 율법에 대한 실천 등등 수많은 부분에서 애를 쓰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자부했고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쳤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은 몸을 원하신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물을 잡아서 바치면 제사가 되는 줄로 알았고, 처음 익은 열매를 갖다 바치면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고, 십일조를 바치면 그것이 곧 믿음인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고 처음 익은 열매를 원하시고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빽빽이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고 나서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은 예배를 원하고, 기도를 원하고, 십일조를 원하고, 우리들의 봉사를 원하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십일조 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수양이나 수염소 등 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절기를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은(사 1:10-14, 미6:7) 지금도 역시 헌금을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일에 교회당에 모여서 주일을 지키겠다고 하는 인간의 노력도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 말자가 아니라 예배하고 헌금한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은 자기 것으로 간주하면서 예배하고 헌금을 했다고 해서 신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종교이고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몸을 드린다고 해서 행여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거나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목사될 것을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나갈 것을 원하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기 몸을 하나님에게 드릴 수가 있습니까? 자살이라도 하라는 것입니까? 평생을 교회 일을 위해서 바쳐라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은 자기의 꿈과 포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하나님에게 드릴 인간은 없습니다. 또 드릴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고생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지 주님에게 몸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육신의 수고와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의 수고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수고 자체가 드린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주님에게 다시 돌려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적으로 훌륭해지고 거룩해져서 그 몸을 드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 해도 몸은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육신 자체를 헌물식으로 받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몸은 오직 예수님의 몸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만 가능한 얘기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대신 바쳐지는 제물의 몸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죽어야 할 몸이 살았다는 것을 계시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신 죽는 제물의 몸을 보면서 내 몸은 대신 죽은 제물의 몸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제사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은 제물로 인해서 살아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며 나오는 이스라엘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은즉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봄으로서 우리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서 죽어야 몸이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몸입니다. 즉 주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몸이기에 주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생명도 몸도 주님으로부터 왔으니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마음대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라는 이것이 바로 주님에게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예배란 일정한 시간에 모여서 드리는 종교적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몸을 드린 자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되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세상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오직 자기의 뜻을 최고로 여기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불변하기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11장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않은 가운데 가두어 두셔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베푸시는데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시고 자비하심을 다시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은 자신의 의의 행위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받은 긍휼과 자비하심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새롭게 된 자들이 드릴 수 있는 영적 예배입니다. 이것을 우리 힘으로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영적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이것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육적 예배는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예배는 성령이 하십니다. 우린 다만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어서 천국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모두 주님의 일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몸을 산 제사로 드린 것이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왔을즉 주님에게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