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3-8 한 몸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데려 왔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3)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와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비록 육신은 각각 분리되어 있지만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한 몸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 몸의 관계가 무너진 것은 인간이 선악에 대한 구별을 하게 됨으로서 입니다. 즉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악이고 이익이 되는 것을 선으로 인식을 하면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나무 실과를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조금이나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그 실과를 줌으로서 먹게 되었노라고 변명을 합니다. 여자는 또 여자대로 책임을 뱀에게로 전가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이익을 선으로 인식을 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손해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실체입니다.

우린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내게 이익이 된다면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온다는 것만 항변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내 이익을 위해서 당신이 피해를 보고 손해를 입는 것은 잠시 참아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데모입니다. 데모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단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힘은 작기 때문에 힘을 모아서 다른 세력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히 피해를 입는 대상이 등장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요란했던 병원의 파업이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병원의 입장도 있고 의사들의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기 전에 생각할 것은, 과연 파업을 하기 전에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자가 발생할 것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의 의료계를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웃의 피해를 나의 피해로 생각한다면 파업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이웃의 피해를 나의 피해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파업으로 인해서 이웃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고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파업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이웃의 피해에 대해 가슴 아프다고 해도 역시 나 자신의 손해와 아픔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의 실체이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린 모두 내가 중요합니다. 내 입장이 우선이고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지 타인의 입장이나 타인의 생각은 내 뒤로 밀려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또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여전히 각기 다른 몸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절에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담임 목사가 전하는 설교만 들으면 되지 다른 곳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각자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불평할 이유도 없고 모자람을 느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것에 대해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타인이 내 옆에 등장을 할 때 그 사람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많이 받은 이웃이 내 옆에 있다고 해도 자신의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옆에 등장할 때 우리는 꼭 비교하게 됩니다. 누가 많은가를 따지면서 잘남과 못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지 서로 다른 지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한 몸이라는 관계로 설명을 하는 것은, 성도는 바로 한 몸에 소속된 지체와 같은 관계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에 대해서 불만이 있고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주어진 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몸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들의 몸에서는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달려 있습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으며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스스로 되고 싶은 것을 고른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손이 손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손을 위해서 손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손은 몸을 위해서 있습니다. 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발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발이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같습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지 각자 자기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몸입니다.

몸이란 어느 특정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만을 가지고 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체가 곧 몸입니다. 손도 몸이고 발도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이 발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또 발이 자기 역할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손이 되려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말도 이런 의미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체들에게 주어진 것은 각자가 다릅니다. 부자로 태어나는가 하면 가난한 자로 태어납니다. 똑똑한 자로 태어나는가 하면 미련한 자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비교가 발생하고 잘남과 못남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잘난 자는 못난 자의 위에 있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의 아래에 위치하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교회에서 보여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님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관계를 말합니다. 몸안에서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지체란 오직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손이 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삽니다. 발이 발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삽니다. 몸을 위해서 손은 손의 역할을 하고 발은 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만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지만 존재 이유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몸을 위해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남보다 못나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 못나 보이는 자리에서 몸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관계입니다. 그럼으로 교회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손이 손으로 지음 받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6-8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있고, 구제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아서 그 은사로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목사로 봉사하는 은사가 귀하고 그냥 일반 성도로 봉사하는 은사가 못하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가르치는 은사를 주셔서 목사로 살아갈 뿐입니다. 믿음이 좋아서 목사된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직이 귀해서 특별히 주신 은사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지체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일뿐입니다. 이것이 한 몸된 관계입니다. 그 어떤 환경이 주어졌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 하는 것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따로 구별될 수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주님을 증거 하라고 세워놓으신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게 좋은 역할을 원한다면 이것이 바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너희 것으로 여기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위한 몸, 즉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지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시지 나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을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몸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