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장은 1절에서 말씀하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12장은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 신자의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하나님에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렸다면 내 몸은 없는 상태입니다. 비록 눈에 보인 육신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이고 살아가지만 내 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몸으로 살아갈 때 그 삶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분명히 실천하라는 것으로 들려집니다. 그러나 사실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의 능력 밖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라는 말씀이나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씀이나 낮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나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으로 평화 하라는 것이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는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능력 밖의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할 수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내게 있는 사랑으로 사랑해 보겠다고 한다면 결국 결과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겉치레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을 때 핍박하는 자를 축복함으로서 자신이 신앙과 의로서 성숙한 인간되었음을 확인하는 기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행위로 그치고 말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행위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행위는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곁가지를 붙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를 신자되게 하는 중심된 것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릇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지 그릇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빛이 없는 그릇은 결코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빛이 없는 그릇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빛되는 것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속에 그리스도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애당초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가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노력이나 열심이니 하는 것들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릇 스스로 빛을 발하려고 애를 쓰는 헛된 욕망이요 열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릇에 빛이 담겨 있다면 빛 스스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릇은 단지 빛을 담고 있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노력과 실천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리스도 스스로 자신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에게서 행동으로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이해하신다면 신자의 실천이나 행위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역시 우리들의 실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고 원수가 주릴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운다고 해서 신자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신자되었기 때문에, 그 속에 그리스도를 담고 내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주님에게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게 되는 것이고, 원수라 해도 그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볼 때 어렵다는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왜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까? 누군가를 축복하라는 말씀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물론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친한 사람, 나와 가까운 부모 형제라면 얼마든지 축복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주린 자를 먹인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는 양심은 주린 자를 보면 동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정심으로라도 얼마든지 먹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원수입니다. 원수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한다는 것은 그 속에 핍박하는 자에 대한 미움이 없을 때 가능합니다. 원수에 대한 감정이 없을 때 그가 주리면 먹일 수 있는 것입니다. 타인의 즐거움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비교하는 것이 없을 때 가능합니다. 결국 이 모두를 하나로 압축하여 생각한다면 내 몸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존재하지 않을 때 가능한 문제들을 말씀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은 내 몸을 산 제사로 드린 자에게서 보여지는 열매를 말씀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모두 그리스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실천되어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신자밖에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것은 내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동행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기 밖으로부터의 초월적인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 아래서 처리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 밖의 초월적인 존재에 자신을 의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은 신앙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이 사라지고 무능력한 자로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동행을 하고 불리할 때는 거부하고 도망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죽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중심으로 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거부하는 자신에 대해서 한탄을 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느긋할 수는 없습니다. 하면하고 안되면 그만이다는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자의 삶은 이럴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 본문이라면 우린 본문을 대하면서 아직도 내 몸을 내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고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난은 자신의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짐을 지게 하는 힘과 능력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고난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슬픔과 고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힘으로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삶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주변에 나를 핍박하는 자를 보내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무시하고 욕하는 자, 시기 나는 자, 원수 같은 자들을 보내십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을 도구 삼아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 앞에서 '왜'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라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몸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몸으로서 증거 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