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1:1-18 나오미와 룻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 이해하기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해야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피조물의 입장을 헤아려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장만 고집 피웁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입장과 형편과 처지를 헤아려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쉽게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그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못하게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라는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을 함으로 인해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제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은 패배하게 하시는 변덕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원망을 했으니까 벌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넓은 이해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여러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재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없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사건말고, 지금 내 주변에서 내 형제, 내 자식이 죽어나갈 때, 과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이럴 수가 있는가?'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에 대해서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볼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옥에 갇히게 하시는지, 왜 매를 맞게 하시는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평강이고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얘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을 존경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얘기를 함으로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참된 신앙인의 길에 있는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도 자주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생각만큼은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이 생각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나에게 유익이 되고 득이 되는 일만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다른 가게는 장사가 안되는데 주일은 꼬박꼬박 쉬는 내 가게는 장사가 잘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내 편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편이라는 것은 자기 기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해주시기를 원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룻의 이야기는 사사들이 활동하던 사사시대를 배경으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기서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있었던 일임을 언급하고 시작하는 것은 사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엉망이었던 이스라엘의 신앙과 대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신앙에 있어서 전혀 가망성이 없는 이스라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서가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엉망이었던 신앙과 룻을 비교하게 함으로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사시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 때문에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흉년을 피해서 먹을 것이 있는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그 아내와 두 아들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하나가 오르바이고 다른 하나가 룻입니다.

이처럼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가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데리고 모압 땅에서 살고 있는데 10년쯤 지나서 두 아들 마저 죽어버립니다. 남자는 다 죽고 여인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고향 땅에 흉년을 그치게 하시고 먹을 것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들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떠날 것을 권유합니다. 8-9절에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라는 말씀을 보면 당시 나오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오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 없이 여인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약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할 대상이 없는 나오미로서는 자신에게서 전혀 소망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따라온다면 그것 자체가 고생이기 때문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이 각기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살아갈 것을 권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권유를 듣고 며느리들은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0절)는 말로서 나오미를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절)는 말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형이 후사를 두지 않고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해서 형의 후사를 이어가는 이스라엘의 풍습이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 풍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 자신에게는 태중에도 아이가 없고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설사 지금 남편을 두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언제 그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자신을 따라오는 것보다는 각기 남편을 구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오르바란 며느리가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시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다는 생각을 굽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보면 이 본문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버이 날이나 가정의 날이 되면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룻의 이야기를 하면서 룻이 효부임을 강조합니다. 즉 룻의 이야기가 효부 이야기로 바뀌어서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본문이 효부 룻을 말하기 위해서 있을까요?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16절의 룻의 말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룻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객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하신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객지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보다 더 못한 형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과연 나오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하고 나오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잘 봐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나오미가 겪게된 불행에 대해서도 다 목격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방인인 룻의 입장에서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은 그렇게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한 사람을 잘사는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실패만 한다고 할 때 과연 누구의 하나님을 원하겠습니까? 분명 잘사는 사람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오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이방인이 나오미를 바라볼 때 나오미의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그런 하나님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을 믿는 사람을 도와주고 잘살게 해준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에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볼 때 도저히 하나님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흉년 때문에 객지로 가게 된 나오미에게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나오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니까'라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있었던 일이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재현된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해가 되어지겠습니까?

13절에 보면 나오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머니를 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치시기를 원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과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 룻입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대개 영웅적인 것에 호감을 두게 됩니다. 가령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더라는 말씀을 볼 때 '나도 저렇게 죽었으면'하는 바램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은 극구 피하려고 합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이라는 영웅적인 것은 좋아하지만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으면서도 찬송을 불렀다는 말씀을 대할 때 자신도 옥에 갇혀서 찬송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옥에 갇히는 상황은 멀리 하려고 합니다. 스데반 사도바울 등 우리가 볼 때 영웅적인 인물들은 흠모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그들처럼 인도하시겠다고 한다면 거부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단 것만 골라 먹고 쓴 것은 뱉아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쓴 것은 골라서 버리시고 단 것만 골라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절대로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고통과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생각하는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주위에 실패만 하고 고통만 겪는 신자가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사람을 보면서 '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된다고 해도 변함 없이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일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면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금방 원망의 대상으로 변해버린다면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괴로울 때나 편안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여전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질 때 그것을 참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룻은 자신의 희망을 따로 간직하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다른 자기만의 희망이 있었다면 희망이 없는 나오미를 떠나서 자기에게 희망이 되는 것을 찾아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에게 희망인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희망이기를 원했습니다. 나오미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을 자기 희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외에 자기 희망으로 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희망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세상 것을 잃는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돈입니다. 힘이 되는 남편이고 자식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구출하시고 영원한 나라에 인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불의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오직 유일한 소망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보고 사는 신자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나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하나님'을 말할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나오미를 바라보면서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하는 룻의 고백에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항상 나를 도우시고 나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봅시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고난을 잊어버린 채 잠시 살다 갈 세상에서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고난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그 고난 안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