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1:15-22 나오미의 하나님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즉 가짜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참된 하나님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부르고 있고 섬기는 하나님이라고해서 참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교회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알아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연구해서 발견해 낼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들 앞서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의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울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한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그분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분들과 같은 고백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고백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내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에 모셔 놓고 하늘을 향해서 믿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많은 교회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벌리고 행여 하나님이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염려가 되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들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도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면 잘못이라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현재의 삶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시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다만 막연한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에서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듣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이 자신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을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과연 그 하나님이 계셨는지 찾아보고 이제부터라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부르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흉년을 피해서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떠난 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은 상황은 아니라도 할지라도 같은 형편과 처지에 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보이는 반응과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이 보이는 반응과 비교할 때 과연 같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서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얻은 것은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참담함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상황에 대해서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오미는 자신이 비참한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치신 결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 나오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떠났다는 것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흉년이 든 상황에서 누구든 살길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 위에 세워진 판단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살길을 찾아서 이방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결국 신앙 위에 세워진 판단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소견으로 내려진 판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의 상황, 남편과 아들이 죽는 상황에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자신을 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잘못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오미가 약속의 백성으로 약속의 땅을 떠난 잘못됨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했다면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실패와 절망이라는 상황에서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의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의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인식하고 있을 때 실패와 절망 속에서 자신을 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짜 하나님은 인간을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인간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역할만을 합니다. 그러므로 가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실패와 절망의 상황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신에 대한 원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신자를, 자기 백성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다운 모습에서 벗어날 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입니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나오미의 고백은 2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베들레헴 온 성읍이 '이가 나오미냐'라고 하면서 떠들썩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을 떠난 나오미가 남편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홀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에 놀란 말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향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게 된 나오미는 초라함과 절망을 함께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의미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은혜로운 자' '사랑스런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나오미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전능자가 하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오미가 만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이 괴롭게 하셨다라고 하기보다는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생각도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대개가 우리의 일을 해결해주는 능력이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능력, 우리를 복주시는 그 능력, 이러한 것을 대개 전능하심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병 고치시는 것이 전능일 수 있지만, 못하실 일이 이 전혀 없는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전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외국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대단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외국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외국말로 말하고 있는 것뿐이지 무슨 대단한 능력을 행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역시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입장에서 전능을 이해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겨우 병이나 고쳐주고 기적이나 일으키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다릅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전능하심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괴롭게 하시는 것은 자신이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이방 나라로 갔지만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미는 자신의 실패의 의미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실패와 절망 속에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21절에 보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고 말합니다. 풍족하게 나갔더니 비어 돌아왔다는 것은 나갈 때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를 잃어버리고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징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나오미를 보면서 우리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나오미처럼 괴로움과 절망과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먼저 보입니까? 나는 괴로움과 절망과 실패에 처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반응부터 먼저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망과 실패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임을 생각합시다. 분명 절망과 실패의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실패의 상황을 기다리고 요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에게 절망과 실패의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자리에서 분노하고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오미가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여러분의 괴로움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할 때 그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괴로움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깨달았다면 그가 바로 참된 하나님, 전능자를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린 지금 룻의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를 바라보면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선택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간 본문을 통해서 살펴본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고 성공하도록 밀어주는 하나님입니까? 적어도 나오미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나오미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풍족하게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분이 아닙니까? 빈손으로 나갔으나 풍요로움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렇듯 나오미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나오미의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알고 그 분을 섬기기로 원하십니까?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나오미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징계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전능하심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참된 분으로 섬기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신앙의 길에 계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우리는 룻의 입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16-17절을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룻의 이 말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겠습니까? 단지 시어머니에 대한 효심에서 나온 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냥 '나는 죽어도 어머니를 버릴 수 없다'는 말을 하면 되는 것이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만일 자신이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을 볼 때 룻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치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날 때 징계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은 있습니다. 즉 룻에게도 나름대로의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를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이 참된 분이심을 알았기에 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르바는 처음에는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하다가 자신을 따라오면 희망이 없다는 나오미의 말에 결국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룻과 오르바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르바가 처음에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한 것은 나오미에 대한 정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룻과는 다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을 보고 있었지만 오르바는 단지 나오미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희망이 되는 길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룻의 선택으로 삽니까 아니면 오르바의 선택으로 삽니까? 룻의 선택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좁은 길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은 넓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을 택하는 자의 차이는 무엇을 보느냐에 있습니다. 참된 생명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좁은 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는 괴로움과 때로는 실패와 절망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주님이 가신 생명의 길임을 안다면 그 길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보지 않고, 참된 생명을 보지 않고 자기의 편함과 자기 인생의 성공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넓은 길을 가게 됩니다. 당장 바라볼 때 넓은 길에 희망이 있고 성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보는 자와 보지 않는 자의 차이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생명을 보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되는 것을 찾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좁은 길보다는 당장 보기에 좋은 넓은 길을 원할 것입니다. 생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지는 유익함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참된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룻처럼 나오미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약속대로, 말씀대로 실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확정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나오미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괴로움과 실패와 절망 속에서 전능자의 일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절망에서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따라서 비록 여러분이 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여러분이 가야 할 길로 마음에 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기에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뜻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