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2:1-13 하나님이 하시는 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비어 돌아오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1:21절에 보면 나오미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는 이 말씀은 사실 우리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식은 빈손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대하고 믿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가요? 하지만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상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는 가장 먼저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부터 해야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믿음을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이용을 합니다. 실패 없는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말한다 해도 거의 모두가 자기 개인을 위한 계획과 뜻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계획과 뜻은 없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이사야 55:8-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나름대로 정하신 길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길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떠나는 나오미의 가정에 주어진 것은 '실패'였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버리는 실패를 안고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나오미의 인생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흉년을 피해서 갈 때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오미가 여인으로서 의지하고 힘이 될 수밖에 없는 남편과 아들을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믿어봐야 별 수 없다'는 생각에 머물러서 몸은 교회를 찾아도 그 생각과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머물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머물지 못한 채 끝까지 우리 자신의 길과 우리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로 머물러 버리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우리의 생각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그 길과 생각은 우리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길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생각을 살피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이며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는 불행, 즉 실패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남편과 아들이 죽는 엄청난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시각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실패가 나오미에게 주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오미를 고향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 그가 의지하던 남편과 아들을 잃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오미가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은 성공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시각에서는 실패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에서 보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오늘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그 길을 알았다고 해도 과연 하나님의 생각과 그 뜻에 순순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두게 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할 때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기쁘게 그리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두고자 할 때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한번 깨달음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함을 한번 체험했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며 스스로 사단을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사단의 유혹에 의해서 깨달았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두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다 압니다. 다 아는데 굳이 나에게 실패를 주실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 생각에 타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실패하게 하신 것이라면 이미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임을 알고 있는데 굳이 실패를 주실 필요가 있는가?'라는 이 생각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푸념은 결국 실패를 피하고 싶은 우리의 본심에서 나오는 변명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생각까지 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신자로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 우리의 생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생각을 높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들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생각으로 가득찬 채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나오미를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나오미가 의지하던 사람은 남편 엘리멜렉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만큼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남편이 없다는 것이 전혀 흉이 될 것이 없는 시대이고, 여자라도 얼마든지 일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여자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은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도와줄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여자에게는 기업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자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남편 엘리멜렉을 대신할 존재가 등장합니다. 1절에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보아스가 재물이 많은 사람이며 그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의 이야기에 보아스가 먼저 등장을 하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 4:17절을 보면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두고 사람들이 외치는 말입니다. 분명 룻이 낳은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2:1절에 등장하는 보아스란 사람은 단지 나오미를 도와주는 이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 잃어버린 엘리멜렉을 대신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말은 나중에 4:17절을 설교할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오미는 이제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룻 역시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남편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핏줄을 이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가고, 가문을 이어가는 존재로 보아스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1:22절에 보면 나오미와 룻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보리 추수할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이 없는 가난한 자들은 추수할 때가 되면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율법에서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추수하는 사람들은 밭 모퉁이의 농작물과 떨어진 이삭은 남겨 놓도록 말씀하셨습니다(레 19:9,10, 23:22).

룻 역시 생계를 위해서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전혀 계획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룻이나 나오미는 보아스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보아스란 사람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 편에서도 우연이라면 하나님도 계획하지 않고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사람들에게는 항상 우연히 되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시라는 필연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나오미의 남편이 죽음으로 나오미의 족보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장을 보면 보아스로 인해서 끊어질 족보가 새롭게 이어져 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다윗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이 누구인줄은 다 알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예수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다윗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생명의 족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으로 계속되었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을 나오미가 엘리멜렉이 죽고 그 자리에 보아스가 들어옴으로서 예수님과 연관된 족보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룻기 이야기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오미를 인도해 가시는 그 길을 먼저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인도해 가시는 길은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엘리멜렉으로 이어지는 가문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땅을 버리고 이방인의 땅에 몸을 의탁하는 엘리멜렉을 통해서는 결국 생명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나오미에게 엘리멜렉이 죽고 대신 그 자리에 보아스를 세우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악으로부터 끊어버리시고 항상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부터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오직 생명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만을 남겨 놓기 위해서 악이 되는 것은 끊어버리고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 것을 끊어버리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해졌을 때 풍랑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선원들이 행하는 것 중에는 배에 있는 무거운 것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배를 가볍게 함으로서 풍랑 속에서도 버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없는 상황에서는 버릴 필요가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지만 풍랑이라는 상황에서는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린 지금 풍랑을 만난 처지와 같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풍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은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우리를 침몰시키는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발견하기에 그 짐을 버리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하신 일은 나오미로부터 엘리멜렉을 끊어버리시고 대신 보아스를 세우신 것입니다. 엘리멜렉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삶에서 보아스의 은혜를 입는 삶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엘리멜렉이 나쁘다 보아스가 좋다는 식으로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에게 되어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에게서는 흉년 때문에 하나님의 땅을 버리는, 즉 자기 목숨을 위해서 약속을 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애당초 그러한 남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이런 나오미에게 엘리멜렉 대신 보아스를 세우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세상을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고, 보아스가 그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룻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말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남자들에게 명해서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고,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방여인인 룻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룻이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여인으로서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아스의 말은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1-12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 온 일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너에게 상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이 무엇입니가? 보아스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보호 아래 살아가던 사람이 여호와의 날개아래 거하기 위해서 여호와께로 옴으로서 여호와께서 그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높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나오미나 룻에게 되어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일하시는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떤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을 버리고, 우리들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동조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우신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역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나오미가 자신을 환영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오미의 괴로움은 결국 새로운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들이 내 손을 떠난 것이 아닙니까? 내가 믿고 내게 힘이 되던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고통이고 괴로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여호와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입니까? 돈입니까? 여러분의 직장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새로운 은혜의 중심되는 분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은 결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개 아래 거하고자 하는 자는 오직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에서 마음이 멀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괴롭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돌리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과 열심을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오직 은혜로 되어짐만 자랑할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을 때, 그래서 낙심과 절망이 있고 원망과 불평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도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캄캄한 절망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희미하고 의심이 가는 빛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빛은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주어진 실패는 절대로 실패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성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