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4:1-8 손익계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고 희생적인데 반하여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극히 반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바라볼 필요 없이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는 부지런하고 희생적이라고 하지만 신앙적인 유익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고 오직 육신에 유익이 되는 일에만 부지런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 편함을 위해서라면 신앙적인 유익이 있는 자리나 일도 과감하게 마다하고 포기해 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 사랑과 편함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집스러운데 반하여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덤덤하고 감각이 무디어져 버린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지만 관심은 수준 있는 삶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생각과 관심이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있습니다. 돈이 벌릴 때는 흥이 나고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든든하고 세상이 새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이면서도 신자에게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아예 마음이 닫혀진 채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불려와서 듣기 싫은 훈계를 듣고 있는 심정으로 앉아있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 흥이 없고 새로움도 없고 일주일에 한번씩 반복되는 행사 정도로 여겨버리고 6일 동안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는 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앉아 있는 참으로 메마르고 빈약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은 과연 어떻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신앙적 유익에 부지런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개인적 편함을 앞세우며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고집을 부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그래서 좀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는가를 물으면서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포기하는 삶이 되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 31:27절에 보면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모세에게 비춰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역하고 목이 곧은 자들이었습니다. 패역하고 목이 곧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마음이 참으로 고집스런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노골적으로 '우린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나섰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 패역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마음에서 돌이킬 의도가 전혀 없는 고집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써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죽음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것은 항상 자기 육신이 편함과 유익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목이 곧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패역과 목이 곧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말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서 사는 것에는 관심이 멀어진 것은 아닙니까?

계 2: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면서도 사랑과 은혜를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고 책망하십니다.

계 2: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가슴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잃어버린 사랑과 은혜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의 패역함과 목이 곧음의 상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직시함으로서 예수님의 희생과 피로써 살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를 찾는 내용입니다. 룻 3:12-13절에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에게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업 무를 자는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그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그가 기업 무르기를 거부한다면 다음으로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름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법도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의를 앞세워 행동하지 아니하고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업 무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만약 그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 책임을 행할 것임을 맹세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있을 때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보아스가 그를 불러 세우고 장로 십인을 증인으로 부른 다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3-4절)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인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에게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관할하니까 그 기업을 무르라고 말합니다. 만약 무르지 않겠다면 다음 자격자인 자신이 무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자 그 기업 무를 자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기업 무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 즉 기업 무를 자는 처음에는 무르겠다고 하고서 왜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까? 그것은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라는 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처음 말한 것은 나오미에게서 기업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승낙을 한 것은 아마 단지 기업을 사주면 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업 무를 자가 단순히 나오미의 기업만 사주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분명 유익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업이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업 무를 자의 처음 승낙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경우에 희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누군가에게 땅을 샀다고 해도 희년이 되면 다시 되돌려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그것은 상속자가 없는 친족의 땅을 무르게 되면 희년이 된다고 해도 돌려주지 않고 자신에게 영원히 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속자가 모두 죽은 나오미의 가정의 경우 그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기업이 확장되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그에게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자 그는 그 일이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것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과는 달리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룻에게서 사서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한다는 것은 룻에게서 산 기업이 죽은 자, 즉 죽은 룻의 남편이 이름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 무를 자가 룻과 결혼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업 무를 친족이 룻과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룻이 남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룻이 남편이 죽은 과부의 처지가 아니라 처음 결혼하는 상태라면 당연히 남편에게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을 무르기 위한 결혼입니다. 즉 죽은 자의 기업이 죽은 자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 하는 결혼이기 때문에 기업 무름을 위한 결혼은 남자가 여인의 죽은 남편의 이름을 대신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의 말을 들은 그 친족은 당장 '이것은 나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일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업을 사되 자기 이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기업 무를 일을 보아스에게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는 이 친족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처음에 말한 대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열성적으로 부지런합니다. 자기 유익을 얻고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열심인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지켜지고 증거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덤덤합니다. 말씀이 지켜지는 것보다는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싶을 때 '무르겠다'고 한 친족이 오히려 손해가 되겠다고 여겨질 때 '네가 무르라'는 말로서 자신의 할 일을 회피해 버리는 이 모습이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단정지어 말한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것이 우리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 친족을 보면 행동 원칙의 기준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손익 여부' 이것이 곧 이 친족의 행동 원칙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는 일은 그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떠한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회피해 버립니다. 선택 여부를 자신의 손익을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4절의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는 말과 6절의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는 말을 서로 비교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말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남에게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 반면에 손해가 될 것 같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교회에서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형제를 대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봅니다.

사사기서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는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소견을 가지고 행동 원칙을 정할 때 결국 기업 무를 친족처럼 자신의 유익을 따라서 행동하는 모습만 보여질 것이 뻔합니다.

더 나아가서 8절에 보면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고 말합니다. 그 친족이 신을 벗는 이유는 7절에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게는 모든 일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해서 신을 벗어 주는 것이 전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기업 무를 친족이 신을 벗는다는 것은 기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신 25: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편이 죽었을 때 죽은 남편이 형제가 그 아내를 취하여 죽은 형제의 후사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형제가 그 일을 원치 아니하거든 죽은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신 25:9)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게서는 '신벗기운 집'이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신 25:10).

이 말은 사실 그를 아주 모욕하는 말입니다. 자기 책임을 회피했다는 말이 곧 신벗기운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를 친족이 보아스에게 신을 벗어 주면서까지 기업 무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수치와 모욕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현재 우리들의 믿음의 삶에 있어서 문제는 없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입술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과 입술은 그리스도의 길에 있으면서도 삶은 그리스도와 다른 길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믿음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신 정신이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손익 여부를 계산하면서 순종할 것과 거부할 것을 구분하셨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행동 기준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기에 행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행동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수님의 뜻이 일치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된 뜻과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물론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자기 유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내 유익과 손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때로 많은 갈등을 하면서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기 유익을 따라 결정하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결정 뒤에 애통함과 한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유익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전혀 잘못됨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함이 없고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해 봅시다. 혹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싫거든 교회에 출입하기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싫은 사람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과 내 유익 사이에서 수시로 말씀을 저버리고 내 유익을 따라가는 자신이 보여지고 그것을 심각함으로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삶이 고쳐지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열정이 있거든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지식 십자가가 과연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남에게 유익을 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죽음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스스로 손해 당함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유익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편함과 유익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을 죽이시고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지 않게 하는 능력은 주님의 희생과 섬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희생과 섬김이 우리의 삶의 정신을 지배함으로서 자연히 우리의 행동 또한 주님의 희생과 섬김의 정신을 따라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버리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행동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대된 길을 가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행동에 대해서 회개하게 될 것이고 진실로 그리스도의 삶의 정신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백성을 자기 유익보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인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가도록 붙드시고 힘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보다는 자기 유익에 웃고 손해에 우는 삶에서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마음에 두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유익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지는 유익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만 영원한 유익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서 눈에 보이는 유익을 쫓아가는 연약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길을 가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분명 피곤하고 때로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고 피곤이 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1:3절의 말씀대로 믿음에는 역사함이있고, 사랑에는 수고함이 있으며, 소망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역사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수고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인내가 없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여러분이 자기 유익과 편함을 위해서 행동할 때 그것이 다른 형제들에게 과연 어떤 유익이 되며 영향을 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내 편함을 위한 행동이 다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형제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친족이 기업 무르기를 거부하면 자신이 무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과연 보아스는 기업 무름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맹세를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5절의 말까지 하는 보아스라면 그 역시 룻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손해밖에 되지 않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것을 손해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봤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고엘이 되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고엘이 되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기업은 끊어지고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진 자로서 우리의 마지막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엘 되기를 거부하는 친족을 대신해서 스스로 고엘이 되어주는 보아스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엘 되심으로 기업이 끊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엘 되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 내 유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