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4:9-12 보아스와 룻의 결혼

지난 시간에는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나오미의 끊어진 기업을 이어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자기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기업 무르기를 포기하고 그 책임을 보아스에게 담당시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린 그 친족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로서 말씀을 위해서 나에게 올 수 있는 손해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손해가 없을 때에는 부지런히 믿음을 말하다가도 손해가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우리들의 실체를 잘 알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미의 기업 무르기를 허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우린 이런 보아스의 행위를 단지 미덕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한 미덕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름에 있어서 자신에게 올 손해를 생각하고 고민을 했다거나 그 고민을 극복하고 기업 무르기를 허락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보아스는 기업 무르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우선으로 두고 있는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우선되어 있기에 자신의 손해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이 단지 내 일이라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삶과 해야 할 일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삶 속에 따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과 신자로서 할 일을 따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자의 삶을 이원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은 그냥 나의 삶이고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삶이다'는 식으로 보통 사람의 삶 속에 또 다른 신자로서의 삶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삶과 행함이 구분되어 가르쳐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삶이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삶의 방향이 말씀이 증거하는 영생일 때 그것을 신앙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삶은 자기 손해 여부를 따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기에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죽은 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유익되는 것은 없고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일입니다. 이 일을 보아스가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보아스가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성도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산다면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미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앞세울 뿐입니다. 보아스는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하기 위해서 희생을 하면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말씀 앞에서 참으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복음만 전하면 내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의도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한순간도 우리 자신의 유익에서 떠나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룻기서의 보아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1-12절을 보면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일에 증인으로 나선 백성과 장로들의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 즉 룻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다같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이를 낳게 된 사람들입니다.

창 29: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레아는 하나님이 그의 태를 열어주심으로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창 30:22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라는 말씀을 보면 라헬 역시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심으로 아이를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룻을 라헬과 레아와 같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이를 낳은 두 사람처럼 룻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번창케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단지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말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없던 라헬과 레아 두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졌다면 그것은 누가 하신 일입니까? 바로 여인들의 태를 여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 세워질 근거를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 역시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내인 라헬과 레아 역시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심으로 아이를 낳았고 그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은 인간의 자연적 출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출생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전혀 세워질 가망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이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룻이 라헬과 레아와 같기를 원한다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와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분명 스스로 기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기업을 위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기업에 대한 소망도 끊어진 사람이 죽은 자입니다. 그런 죽은 자의 기업이 누구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입니까? 바로 보아스와 결혼하게 하신 룻을 통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라는 말 역시 보아스란 한 개인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스를 룻과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일이 보아스를 통해서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날 이름입니다(창 48:7). 베들레헴에서 보아스가 유력하고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보아스의 기업 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욱 유력하고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자가 영생을 바라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했을 때, 그 신자로 인해서 유명케 되는 분은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행위만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인간을 부르셔서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놀라면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를 통해서 높여지고 유명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만약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기대하고 뭔가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는 신자의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유명해지고 나에게 유익이 오기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으로 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신자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라헬과 레아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진 일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라헬과 레아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칭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말고 그 사람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되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참된 모습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높이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각이 굳게 세워진 신자라면 결코 사람을 보지 않을 것이고, 사람에 의해서 흔들리는 마음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실망했다던가 하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또 사람의 위대함을 말하면서 사람을 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얘기가 12절에서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 역시 라헬 레아와 같은 경우입니다.

다말이 어떤 여자인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서 가문이 끊어질 위기를 자신의 희생으로 극복한 여자입니다. 그렇다면 다말로 하여금 스스로 창녀가 되게 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는 가문을 위해서 수치를 마다하지 않는 마음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역시 다말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말을 있게 하시고 다말에게 자신의 수치보다는 가문의 이어짐을 생각하는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레스는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면 왜 첫째인 세라의 이름은 언급이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가 베레스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등장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과 족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아스를 룻과 결혼하게 해서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이 등장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절에서 보아스는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한다는 말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죽은 자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기업이 다른 이름이 아닌 죽은 자의 이름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죽은 자의 이름을 잇기 위해서 개업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즉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의 기업이 이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을 결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보아스로 하여금 죽은 자의 기업을 잇게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자의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분명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얘기는 어찌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단지 보아스와 룻의 결혼과 그 결혼을 축복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히 보이십니까? 여러분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의 경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단지 자신에게서 일어난 상황과 형편을 보면서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일에 우연이라는 것이 없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있든 그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셔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삶을 번창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에게 부족한 세상 것을 더욱 많이 채워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처럼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해서 기업 무름을 회피하는 행동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손해가 있든 유익이 있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손해와 유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비록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손해가 있을지언정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손해까지 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열심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 다스려지고 있는 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은 자로서 하늘의 기업에서 끊어진 우리가 누구 때문에 하늘의 기업에 계속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옛날에 있었던 라헬과 레아에게 아이를 낳게 하시고 다말에게 아이를 낳게 하시고 보아스와 룻을 결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이미 계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린 그 덕분에 지금 하늘의 생명을 누리는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만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묵묵히 말씀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임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는 말씀에 대해 무능한 우리 스스로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되어진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