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4:13-22 나오미의 아들

예수님의 피흘리신 은혜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그 가치와 귀함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출해주신, 그래서 심판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하신 능력이기 때문에 오직 심판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고 그 무엇으로도 구출될 가능성이 없는 참으로 비참한 이 세상의 처지를 알았을 때 예수님의 은혜는 그 무엇보다 크고 귀한 것으로 우리의 심령에 자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만으로 참으로 마음 벅찰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는 과연 그러합니까?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그 은혜가 은혜로서 높임 받고 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높임 받기는커녕 멸시받는 것은 아닌지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영원한 멸망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스도만을 높이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십니까? 진심으로 천국만을 소망하며 사십니까? 세상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십니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늘의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에 관심 두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대해서 엉망인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출될 수 없는 멸망의 자식이었음을 깨달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라면서도 예수님의 베푸신 은혜보다 세상을 더 소망하고 좋아한다면 그것은 결코 신자로서 온전한 모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 온전한 모습은 좋은 일,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신자가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신자를 세상에서 구분하려고 하신다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지한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구분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이 은혜 역시 우리의 일과 상관이 없는 은혜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의 우리 일을 도와주고 이루어주는 은혜가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고 인정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심판에서 구출하신 은혜를 말합니다. 따라서 은혜를 아는 자는 필히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계획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잘 아는 우리들의 마음이 항상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 것에 희망을 두는 본질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린 흔적이 수시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그동안 룻기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말로만 '돌아 오라'고 외치는 분이 아니라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붙입니다.

롬 8:38-39절에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한번 예수 안에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이 예수 안보다는 세상 안을 더 선호하고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항상 예수 안에서 뛰쳐 나갈려는 우리를 붙들어 놓는 능력의 손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예수 안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 영생, 천국,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속에서 교만이 사라진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실 신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과 구별되는 기준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전혀 수고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도 그 열매를 거두어 먹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 되시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룻기서의 마지막 본문에서 다시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함으로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신기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성경은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언급하는 것입니까?

만약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보통 남녀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면 결국 룻기서는 룻이란 이방여인이 남편을 잃어버린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서 다시 새로운 행복한 삶을 찾는다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서는 룻의 고통이 아니라 나오미의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흉년 때문에 약속을 땅을 벗어나서 살 길을 찾아서 이방인의 땅으로 떠난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을 잃어버린 고통으로 시작하는 것이 룻기입니다.

나오미는 남편도 아들도 모두 잃어버린 고통의 사람으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직 며느리인 이방여인 룻 하나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룻기서의 흐름을 볼 때 전에 말씀드린 대로 룻기서의 중심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합니다. 그런데도 룻기서라고 부르는 것은 룻으로 인해서 되어진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17절을 다시 보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보아스와 결혼한 여인은 룻이며 아들을 낳은 사람도 룻입니다. 룻의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축하를 받을 사람은 룻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나오미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베푸신 것으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에게서 나은 아들도 '나오미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룻이 낳은 아이가 나오미에게는 생명의 회복자며 노년의 봉양자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아들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처럼 여인들이 찬양하는 노래를 본다 해도 중심은 나오미지 룻이 아닙니다.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룻의 입장에서 보면 룻이 받아야 할 것이 나오미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인들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나오미가 희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오미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룻을 보아스에게 보낸 것 밖에 없습니다.

나오미의 아들은 오직 룻의 희생 때문에 맺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이방여인으로서 자기 고향을 버리고 이방인이기에 천대와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기업을 잇기 위해서 보아스가 누운 발치 이불을 들고 몰래 들어가는 수치스러운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열매가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로 부른다는 것은 나오미의 아들에 담겨있는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아들을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나오미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나오미는 룻의 희생 덕분에 아들을 얻고 기업을 이어가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나오미는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업이 끊어질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없던 아들이 룻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또 해보십시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나오미에게 기쁨이 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룻을 통해서 낳은 아들을 줄 바에야 처음부터 아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처음의 아들은 죽이시고 다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룻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처음의 나오미의 아들은 인간의 자연적 혈통을 통해서 나은 아들들입니다. 죄의 본질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살 길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도 얼마든지 포기하고 버려버리는 멸망의 자식의 본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이러한 아들로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존의 아들을 죽이시고 룻의 희생으로 낳은 새로운 아들을 나오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희생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기업을 이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없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고 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룻의 희생의 열매를 자신이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들의 찬송의 말을 들으면서, 그리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자신은 수고한 것도 노력한 것도 전혀 없이 얻은 아들을 보면서 룻의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가 아닌 룻의 희생으로 얻어진 아들이기에 아들을 보면서 룻의 희생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참된 신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복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룻이 낳은 아들이 나오미의 아들로 불리는 것을 보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게 합니다. 룻이 희생으로 뿌린 것을 나오미가 거둔 것처럼 예수님이 뿌리신 것을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거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회복자란 죽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죽은 자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나오미에게 생명의 회복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나오미의 상태가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이스라엘로서는 기업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상태와 같습니다.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가 살아있는 생명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이 끊어진 상태에 있는 나오미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의 상태이며 이런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줄 아들의 탄생은 나오미에게는 생명의 회복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룻의 희생으로 탄생한 아들입니다. 즉 희생의 속성으로 이어지는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으로 인해서 다윗 가문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룻의 이야기가 단순히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에 대해서 계시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본문에 언급되는 족보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18-22절에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상하게 룻기서의 족보는 '베레스'란 사람으로부터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다윗까지 말합니다. 베레스는 다말이란 여인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씀 드렸지만 다말은 유다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여인입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면하고 구사일생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레스는 룻이 낳은 아들과 마차가지로 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낳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룻기서의 족보가 베레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베레스와 오벳은 여인의 희생으로 가문이 이어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다윗의 가문이 세워졌다는 것은 다윗 가문은 여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지 다윗이나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다윗 가문에 오시는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닌 예수님의 수고로 되어진 생명이기에 이 생명을 우리의 노력으로 지키려고 한다거나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힘으로 믿음을 얻으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교회에 의해서 은혜가 멸시되는 어처구니없는 실태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자일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세워졌습니다. 희생을 알고 희생에 감사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된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인간의 힘과 열심과 노력을 찬송하고 높이는 것은 보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여인들의 희생으로 유지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았음을 감사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속한 산 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그 아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보아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보아스가 아버지라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혈통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혈통으로 나지 않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인간적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것들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졌습니다. 기업 무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의 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은 아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나오미의 아들은 아버지 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나은 새로운 아들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아들을 죽이고 새로운 아들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새로운 아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이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난 자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한대로 거듭난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그 희생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가 산 자가 되었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으며 우리를 예수님의 희생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신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시고 날마다 예수님의 희생을 찬송하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되어진 생명에 감사하면서 여러분이 한 것을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이 수고하시고 뿌리신 것을 다만 거두어 누리는 복에 참여된 큰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