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디도서 1:1-4  전도

 

<본문>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도서 1:1-4)



<설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택한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에게는 개인적으로 이루고자하는 자신의 뜻과 계획이 있을 수 없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들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도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내용이나 디도에게 부탁하는 교회 안의 모든 일들도 교회의 유익이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자들을 믿음과 지식과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는 ‘전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전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도는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는 전도를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고, 교회의 모든 일도 전도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 되는가?’가 목적이 될 뿐,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에 이익이 되는가에 목적을 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의 전도라는 것을 살펴보면, 전도에 대한 이해나 그 방향 자체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 1:38절을 보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전도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진리의 말씀을 내어 놓는 것이 전부였을 뿐,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갔던 사도들 역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의도로 전도를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도만 봐도, 오늘날 교회가 전도하는 목적이나 방향이 크게 다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의 전도는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회원 늘리기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은 불신자를 변화시켜서 예수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전해서 즉시 예수 믿겠다는 작정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실력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사실 신자 되게 하는 것보다는 교회의 신규 회원에 가입시켜려고 애를 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도 이러한 전도는 한 적이 없습니다.



전도는 교회의 신규 회원을 모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은혜를 소개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면 복을 주는 유치한 사랑을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고 죄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만 소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곧 형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입니다.



왕하 7장에 보면 아람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성중에 먹을 것이 동이 나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 성 밖의 네 문둥이가 아람에게 항복하러 간 일이 나옵니다.



그때 아람진영으로 간 네 문둥이는 아람의 모든 군대가 하나님에 의해서 도망을 치고 아람 진영은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문둥이들은 아람 군대가 버리고 간 음식으로 실컷 배부른 후에 자신들이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아람 군대가 도망친 사실을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합니다.



문둥이가 아람 군대가 도망을 치고 아람 진영에 먹을 것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성에 알려 준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대우 받을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둥병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세상과 격리되어 성 밖으로 쫓겨나서 성에서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겨우 연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문둥이를 좋은 소식을 알려 줬다고 해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함께 사는 특별대우를 할 리가 없습니다. 또한 아람 진영의 먹을 것들도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고 자신들은 여전히 성에서 주는 것을 먹고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의 소식을 전해 준다고 해서 크게 혜택을 볼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라고 하면서 그 소식을 자신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취급하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러 가는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아람 군대가 도망을 치고 아람 진영에 먹을 것이 많다는 소식이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아름다운 소식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배고픔으로 인해서 죽을 지경이 되었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배부른 사람들에게는 아람 진영에 먹을 것이 많다는 소식은 아름다운 소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며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길을 가던 노숙자가 무료 급식소를 발견했을 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무려 급식소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려 급식소가 어디에 있다는 소식은 배부른 자에게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무료 급식소를 발견한 노숙자와 같은 처지라면 기쁜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임을 알기에 예수님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고전 9: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는 뜻의 내용이 아닙니다.



신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 역시 복음의 귀함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의 존재였는가를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귀함을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 11:28-30절을 보면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사도의 심정처럼 전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를 보면 애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게 가장 좋으신 예수님을 전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전도자의 마음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사망에 붙들려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도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 신자로서 다른 목적을 갖지 말고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사망에 처한 자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은 자신을 옳지 않게 보는 것입니다.



전도는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회원을 늘리는 수단도 아닙니다. 사망에 처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해방을 얻고 그 기쁨을 우리게 되었을 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인간이 처한 본질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누리게 된 배부름을 알지 못한다면 전도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믿으라’는 말로 그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