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디도서 1:1-4  사도

 

<본문>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도서 1:1-4)



<설교>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그레데에 남겨 두었던 제자 디도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신자가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를 세상이 도덕과 윤리로 여기는 것보다 더 차원 높은 선으로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 일에 열심이고 기도를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그는 말씀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레데의 믿는 자들의 형편은 말씀에서 떠나 도덕적 면에서 조차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도에게 교회를 세우는 일과 교회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일에 필요한 얘기를 서신으로 남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1절, 2절을 보면 사도는 편지 첫머리에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사도의 서신을 보면 의례히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부름 받은 사도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편지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에게 쓴 편지를 보면 다른 편지와 동일하게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도임을 밝히고 있지만, 자신이 사도된 이유를 추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을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는 자신을 위해 사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를 위해 사도 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로서의 삶의 모든 방향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믿음과 영생을 돕기 위한 것으로 향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의 사도됨은 사도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백성들을 위해서였으며 그래서 예수님은 개인적인 영광과 성공을 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백성들의 영생을 위한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라면 오늘 우리도 결코 다른 길을 가는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사도된 것처럼 신자된 것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인데,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이유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항상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도덕적인 면에서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길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모습으로 복음의 귀함과 가치를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진 신자라면 분명 그 행실도 거룩함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덕과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는다면 그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절대 손해 보지 않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결과는 비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신자를 어떠한 길로 인도합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셨습니까? 복음은 개인의 이익이 얻어지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과 손해를 보는 길로 이끌어 가면서 복음의 가치와 영생의 귀함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을 정도로 영생이 귀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복음의 정신을 안다면, 또 자신부터 복음의 귀함을 맛본 자라면 자연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이웃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돕는 길로 가고자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맺어지는 것은 분명 거룩한 행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행실까지도 복음을 소개하고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굳이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삶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복음의 가치와 귀함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천국에 모든 소망을 둔 믿음으로 산다면 그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는 분명 세상에 그 어떤 소망도 가치도 두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힘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고 구별하지 않으며 자신도 그리스도 앞에 죄인이며 연약한 자임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는 거룩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도덕과 차별되는 거룩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을 말하되 믿음에 거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예수님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을 부인하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나의 죄악과 불의함을 보게 하시고 나의 어떤 공로도 의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만 높이는 자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성령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권능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부터 죄인 중의 괴수이며 십자가 공로 없이는 단 한 치의 소망도 없었음을 철처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인지 절감하도록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과 소망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이고 이 일을 하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한탄하시고 때로는 분노하셨던 예수님의 그 심정을 갖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심정을 품게 해서 전도의 현장에 임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방법 지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전도 훈련’이라는 것이 기승을 부리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전도 훈련은 결국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한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선뜻 말을 잘 건네지 못하거나 논리적으로 말을 못해서 체계적으로 성경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권능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그런 것 때문에 복음 전파가 방해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격과 기질적 차이로 보면 됩니다. 또한 그런 것을 바꾸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이 동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한 마디로 나도 죽을 죄인이고 당신도 죽을 죄인일 뿐임을 서로가 온전히 실감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나나 당신이나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 부름 받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신의 성공을 위한 삶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부르는 일에 동원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복음의 귀함과 영생의 소망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사도직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신자와 교회가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목사 자신을 위해 목사로 세움 받은 것이 아니고, 교회 역시 내 교회를 위해 교회로 세워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교회 부흥시키고 크게 만들라고 예수님이 피 흘리시면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바보 같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미움은 받을지언정 그 행실로 인해 비난 받는 것은 분명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돕기 위해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복음의 귀함과 가치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자신부터 천하의 무엇보다 귀한 것이 복음임을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복음이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할 때 신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고자 하게 됩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