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디도서 1:5-9  하나님의 청지기

 

<본문>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디도서 1:5-9)



<설교>

본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언급했던 내용을 디도에게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같은 내용이기에 같은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겠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라고 해도 당시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감독의 자격에 대해 디모데에게 말했을 때, 디모데가 있었던 에베소 교회의 형편과 디도가 있는 그레데의 형편이 같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말이라고 해도 기록된 의미는 각기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디모데가 있었던 교회의 상황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면서, 서로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만 했습니다. 따라서 장로된 것을 특별한 사람 된 것으로 여기고 장로의 직분으로 다른 사람 위에 있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교회 사정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에게 장로의 자격을 말한 것은 한마디로 장로될 자격이 있는 사람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장로 된 자를 향해서 아무도 장로될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장로의 직분으로 잘난 척 할 이유도 없음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반면에 디도가 있던 그레데의 신자는 믿는 자들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5절에서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족한 일이라는 것도 신자로서의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비방거리가 되버린 일을 바로 잡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를 세우는 것도, 단지 직분자로서의 장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의 본을 보일 장로를 세움으로써 교회의 교회됨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한 말이기 때문에 비록 내용은 디모데에게 한 말과 같지만, 그 의미는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에게는 하지 않은 말을 하는데, 7절을 보면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감독의 자격에 대해 얘기하는 의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신자를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의미가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을 신자에게 있는 것이 신자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를 하나님의 청지기답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에게 있는 재물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벧전 4:10-11절을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청지기를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 은혜를 맡은 사람으로 말합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일하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은혜를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청지기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은혜이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를 맡긴 것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가 잘못 생각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개인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았음을 뜻하는 것이고, 은혜를 맡은 자로서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청지기 삶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즉 청지기는 무엇을 해도 그것으로 자기 영광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하면서,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언급하는 것은, 감독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독의 행실이 잘못되어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감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산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목사든 장로든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봉사를 위해 세움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를 통해서 자신의 영광과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 봉사자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사의 정신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를 나타내고 부각시키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봉사의 차원에서 일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하든 어떤 직분이든 누구도 자신의 봉사와 직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리와 힘을 주장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서로의 직분을 두고 힘을 겨룬다면, 그것은 분명 청지기의 자세를 벗어 버린 탐욕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탐욕으로 인해서 교회가 비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하나님의 청지기가 무엇인가를 알고, 청지기로서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힘겨루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뿐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집과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고집과 자존심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한 탐욕에 의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자로 함께 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관계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교회에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장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으로 교회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장로가 바른 교훈으로 교회를 권면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바른 교훈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말하는 자가 자신의 배를 위해 산다면 말은 천국을 믿지만 그 행실은 천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천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신자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만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비방거리가 된다면 과연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믿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형편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삽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구별된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생활에서도 추구하는 것이 달라야 하고 목적하는 것이 달라야 하고 나아가는 방향도 달라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라면 분명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향이나 가치관과는 다른 태도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덕과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를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자가 바르고 선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거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좇기에 비방거리가 되는 악한 행실로 나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어떤 선행의 열매가 맺는다고 해도 그 근거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러한 열매를 맺게 했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청지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자의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