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디도서 1:10-16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

 

<본문>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0-16)



<설교>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면 반드시 착해져야 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착해야 천국을 가고 악하면 지옥을 가는 것이 절대적 진리이며 종교는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교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신은 착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는 벌주는 상선벌악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입관은 기독교와 좁게는 죄에 대한 생각의 차이, 넓게는 모든 사물을 보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불신자는 선과 악을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만 기준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면 흔히들 “나는 지금껏 남을 속인 적도 없고 양심껏 살았으니 하나님 믿지 않아도 된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는 말씀으로 그런 반응이 얼마나 잘못인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생각이라고 해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형제를 말로서 바보라고 욕하면 살인죄라고 했고, 간음이나 살인은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다고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는지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선 행동으로 범한 죄가 아니고는 벌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 중심까지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심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순히 더 고급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악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근본적 가치관은 결국 보이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선행을 많이 해야 천국을 간다는 종교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선을 얼마나 행했느냐만 가지고 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을 향한 비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한 것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생각과 영혼까지 다 감찰할 수 있으며 실제로 감찰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현상적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본질적으로 정반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중점을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접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오해한 채 자신만의 종교 생활에 치우쳐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욥은 아들들의 생일이 되면 잔치를 베풀었는데 잔치가 지나면 아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혹 있을 수 있는 죄까지 미리 예상하여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욥은 당대의 의인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욥은 그것을 신앙의 전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욥은 재앙을 겪으면서 혼란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욥 42:5절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회개를 합니다. 욥은 행동으로만 바르게 살면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여겼는데, 사실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겼던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행동의 바름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알고 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단지 도덕적 삶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인 삶을 위해 신자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신자를 부르신 것은,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를 짓지 않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게 베풀어진 사랑으로 살아야 하고, 긍휼을 받았으니 긍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며, 이처럼 진리에 복종하는 신자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0-11절의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는 내용을 보면 할례당이 바로 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를 취하는 것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행해야 깨끗함을 입는다고 하면서 신자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기들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를 취하려고 헛된 말로 속이며 마땅치 않는 것을 가르치는 영향을 받아 그레데의 신자들은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12-14절). 그러므로 사도는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그들을 책망하고 참된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디도로 하여금 교회에 장로와 감독을 세워 바른 교훈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진리에 복종치 않는 자들을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는 그 행위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린 자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버렸다는 것은, 나쁜 짓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살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린 것이며 이것이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한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 10:32,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합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식당에서 식사할 때 기도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집안에는 성구 액자로 장식하고, 찬송가나 설교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예수를 시인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아주 초보적인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외적인 티를 내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세상 무엇보다 귀하며 나에게는 생명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은혜와 사랑과 긍휼의 자신의 전부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행위로도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말로는 예수님의 은혜가 전부라고 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나쁜 짓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 방법을 이용해서까지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은혜가 전부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헌금을 안해도 좋으니까 세상 속에서 신자는 절대로 부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은혜로 사는 것이고, 은혜를 아는 자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 역시 예수님만이 죄인에게 참 생명을 나눠주신 구세주라는 진리를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해서 교인 숫자 늘려서 교회를 키워보고자 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설령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죄와 죽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오지 않고 다 떠나가도 그래서 사례비를 받지 못한 지경이 되어도 몸과 영혼 모두를 책임지고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십자가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오직 그 소원을 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몸은 죽어도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죽이고 몸만 살리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기독교의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삶을 살면 되고, 용서를 받았으면 나 또한 용서하는 자로 살면 됩니다. 이것이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는 자신을 자랑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자연히 도덕적인 문제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일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는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아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일 반응은 영원토록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앞에 날마다 순간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그 놀랍고도 기이한 보혈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과연 무엇이관대 이토록 나를 관념하십니까?”라는 감사의 찬송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