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디도서 2:1-5  말씀이 훼방되지 않게

 

<본문>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디도서 2:1-5)



<설교>

1:1절을 보면 사도는 자신이 사도 된 것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도로 세움 받은 이유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모든 일은 사도 자신의 사사로운 소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택한 자의 믿음과 영생을 위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던 것입니다.



또한 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도에게 맡기신 이유도 택한 자들의 믿음과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겨서 이루고자 하시는 말씀의 세계만을 염두에 두고 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스승들이 나타나 거짓된 다른 교훈을 전함으로써 말씀이 훼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장로와 감독을 교회에 세워 바른 교훈만을 전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 받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와 감독은, 신자로 하여금 거짓된 자들이 증거하는 헛된 이야기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에만 순종할 수 있도록 교훈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교회에 감독과 장로를 세우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독과 장로조차 바른 진리의 말씀에서 떠난 채 인간을 이롭게 하는 헛된 말에 흔들리고 미혹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로와 감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신자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즉 말씀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세계를 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 회개하라, 이런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세계의 어떠함을 그려서 나타내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즉 말씀이 신자를 서로 사랑하고 비판하지 않고 회개하는 등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복종하는 세계가 어떠함을 어둠의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지, 말씀을 실천하게 해서 복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받은 자로서 말씀에 근거해서 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면 그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겠습니까?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오직 자기 욕망에 이끌려서 자신을 위해 살고, 자기 이름과 힘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처한 지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을 훼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세상에 증거하는 도구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즉 말씀에 의해서 그려지고 있는 색깔들이고 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자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연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디도에게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라(2절)고 말하지만 이것이 늙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또한 3절에서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말하지만, 이 역시 늙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사도가 이처럼 연령과 남자 여자를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연령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특징과 남자와 여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이용해서 신자의 삶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늙은 남자에게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할 것을 가르치라고 하는 것은, 오랜 삶을 산 늙은 남자는 자기 고집이 강함으로써 생각이나 언행에 절제가 없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신자로서 나타내야 할 경건의 모습까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있어서 신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근신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의 늙은 여자의 역할은 젊은 여자들을 선한 것을 가르침으로써 교훈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된 선한 것을 젊은 여자에게 가르침으로써 젊은 여자로 하여금 여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하게 함으로써 진리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늙은 여자들은 술에 취하기 일쑤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거나 험담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행실은 분명 신자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는 행실입니다. 이것이 곧 거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다는 구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도에게 늙은 여자들이 교회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행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교훈해야 했던 것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5절). 그것이 젊은 여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살아가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여자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젊은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가정 일까지 도외시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교회 일에 치중하게 됨으로써 결국 가정의 일은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것도, 당시 복음이 전파된 후 복음에 내포된 자유에 대한 사상을 그릇 이해함으로써 여자들도 자유에 대한 주장을 하게 되고, 그 자유를 남편에게 매인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배경으로 하는 말입니다.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풍조는 여자의 단정함과 정절을 대단히 중시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심한 마찰을 빚게 되었고 결국 교회를 향한 비난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들이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가정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교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교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에 대한 얘기들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신자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 경건, 근신 등의 말이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는 맺어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말씀이 이끄는 삶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이러한 순종에 반발을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인간이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절제와 경건과 근신 등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말씀을 훼방하는 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린 항상 말씀을 훼방하는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를 위한 절제와 근신과 경건보다는 세상에서 이익을 얻는 것에 더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내 고집과 내 성격을 만족시키는 쪽으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의 세계를 이루고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보다는 내가 원하고 주장하는 대로 되어지기만을 바랍니다. 이런 모든 것이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말씀의 훼방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어코 말씀의 세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서, 말씀의 훼방자인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상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오게 하셔서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굴복하게 하심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도덕과 윤리로 치장된 세계가 아닙니다. 착하게 선하게 살면서 세상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다. 말씀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증거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의 세계를 소망하지 않습니다. 온통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대한 소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라면 성령으로 인해서 십자가의 은혜가 증거되는 말씀의 세계가 펼쳐지는 교회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높여지는 말씀의 세계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꿈꾸는 교회를 품고 살아갑니다. 목사는 큰 교회 아니면, 소위 아름다운 교회라는 것을 꿈꿉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이상적이며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즉 그런 교회를 다님으로써 종교적인 만족감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목사와 신자가 만나서 그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적이며 건전한 교회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높이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관심은 교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리스도께 관심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도 욕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은혜로만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펼쳐지는 세계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가 만들어 내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