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디도서 2:11-14  구속의 이유

 

<본문>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 2:11-14)



<설교>

신자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많이 들어온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갈수록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희미해져가고, 대신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지위나 재물에 있어서 더 나은 자가 되어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의 관념이나 사상 정도로 머물러 버리고 하늘의 생명도 막연하게 받아들인 채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힘쓰는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많은 목사들이 절감하는 것은 ‘말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향한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에서 말씀만 전파하겠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직 말씀만 전파하겠다고 한 사람들도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말씀만 전파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부터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복음을 바르게 증거한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했을 때 과연 그 말씀으로 마음이 바뀐 사람이 있었습니까? 때문에 말씀만 바르게 전파하면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증거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우리를 책망하면서 무엇이 진리를 좇는 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악한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다스리시면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드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기 위해 말씀은 증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소위 ‘만민 구원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신분을 초월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철저히 인종과 신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종을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택한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12-13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은, 은혜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신자와 함께 함으로써 양육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에 이른 신자는 구원의 풍성함을 맛보는 자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양육이란 말을 많이 하지만 거의 목사가 신자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의 문제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신자를 자라게 하는 것이 마치 목사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가 신자를 양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다만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일 뿐이며 양육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으로써 은혜로 양육해 가시는 것입니다.



목사의 역할은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로서 심고 물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신자로 양육해 가시는 것입니까? 12절의 말씀대로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리는 자로 양육해 가시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로 양육하시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고쳐 가시고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 방향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양육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이 양육하시고자 하시는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양육하시고자 하시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원하십니까? ‘에, 하나님 너도 그런 신자로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오니 저를 그러한 자로 양육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는 사람은 한마디로 세상사는 재미가 달라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함과 세상 정욕을 버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과연 경건하게 세상 정욕을 버린 자로  세상을 살아갈 때 즐거움이 될 수 있을까요?



경건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구별된 자로서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요? 또한 세상정욕에서 떠난다면 세상 것을 누리고 얻는 재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안들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따로 소망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분명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는 신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른 길을 우리 마음에 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13,14절을 보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양육하십니다. 역시 여러분은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양육되기를 소망합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양육하시겠다는 사람과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됨에서 정 반대의 길에 서 있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그냥 방치한다면 우리가 흘러갈 길이 무엇이고, 마지막에 도달할 곳이 어디겠습니까? 세상을 따라 흘러감으로써 세상과 함께 멸망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계속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양육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은혜로 양육하시겠다는 것은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무지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양육에 관심을 않기 때문에 목사가 신자를 양육하겠다고 설치는 것이고, 또한 목사가 양육하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이 양육하고자 하시는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울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은혜로 양육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진심으로 하늘의 생명이 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있다면 돈 벌고 병 낫는 은혜만을 고대할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쳐 가시고 양육하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해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을 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열심인 것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신자의 할 일입니다.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의 이유입니다.



구원을 단순히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사람으로 양육되어 가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