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디도서 2:15-3:8  선한 일을 힘쓰게 하라

 

<본문>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디도서 2:15-3:8)

 


<설교>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가? 사랑하신다면 그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한 분을 과연 어떻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단지 자신의 느낌만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자신의 느낌이라는 것은 극히 자기 주관적이며 또한 자신의 생각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를 앎으로 자연히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필히 이웃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불쌍한 이웃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이웃 사랑이라면 이 역시 하나님 사랑이 없이도 가능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이웃 사랑을 말씀한 것입니다.



롬 1:14절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슨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내시기 위해 부르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 때문에 부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결국 이방인에게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빚은 어떻게 갚았습니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까? 바울의 빚 갚음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고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전처럼 유대인의 율법에 매어 있었다면 이방인들은 구원을 얻을 가치도 없는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자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4-7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가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되어졌음을 말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람들도 자신과 타인을 구별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긍휼과 사랑을 받을만한 자를 구별하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받았고 또한 안다면 은혜 안에서는 결코 자기 자랑과 업신여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냐?’라고 물었을 때, 그 증거는 자신도 멸망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낮아진 자리에서 모든 이웃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목사도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신자와 구별된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알지 못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겨우 인간의 사랑으로 접근하는 윤리와 도덕이 전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웃의 어려움을 도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도운다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의 이웃 사랑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것을 맡아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것을 이웃에게 전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내가 어떤 자인가를 알게 합니다. 누구와 비교해서도 더 나을 것도 잘난 것도 없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 나에게 주어진 긍휼과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긍휼과 사랑으로 이웃을 만난다면 분명 세상의 것으로 비교하지도, 경쟁하지도 않습니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구원 받을 수 없는 못난 자로 이웃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이런 모습으로 증거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3절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라고 말한 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결국 우리는 자신의 의와 지위와 힘을 가진 채 이웃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에서 온유와 관용과 긍휼이 증거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아무리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의를 근거로 해서 그를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사랑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남보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웃을 업신여긴다면, 그리고 자신의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빌어먹는 거지가 먹지 못하고 있는 거지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증거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감지덕지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부어주신 크신 은혜와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이웃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8절을 보면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선한 일을 힘쓰게 하기 위해서 디도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한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마 19:17절을 보면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신자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있는 선한 것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풍성히 부어주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이 하나님의 선한 것을 담아서 전하고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 놓고 나누기를 힘쓰십시오. 신자는 그런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웃을 훼방하고 비판하고 판단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