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0.23 13:53

(156강) 양과 염소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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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31-4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5314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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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설교>

 

◉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다 ◉

 

종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관심이 자기 구원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고 다만 자신이 구원 받는 것에 중요성을 두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목적과 이유를 자기 구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이 예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복과 심판이라는 미래에서의 구원, 이것이 신앙의 목적과 이유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본문의 비유를 대한다면 어떻게 이해할까요? 임금의 오른편에 있게 된 양이 왜 오른편에 있게 되었는가에 중점을 두면서 선행을 베풀되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잊어버려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찾아서 그대로 실천하자는 내용으로 이해하지 않을까요? ‘칭찬 받은 양처럼 행하여 우리도 염소가 되지 말고 양이 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과 염소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은 양으로 태어났고 염소는 염소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양은 처음부터 양이고 염소 역시 처음부터 염소일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구원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 구원을 위해 뭔가 행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헛된 일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심판은 구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심판은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구분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은 신자를 가리키고 염소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개 보면 심판을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해서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비유는 그러한 의미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것은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구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목자 되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심판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택 ◉

 

34절에 보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합니다.

 

 

임금의 오른편에 있는 자가 받을 복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복이라면 오른편에 있는 양은 이미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로 선택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 있을 양과 염소의 구분은 그동안의 행실이나 신앙을 기준으로 해서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선택되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창세전부터 오른편에 세움 받을 자로 선택된 자가 있고, 그가 어떻게 살았든 그 삶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면 인간에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항변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고 구원된 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신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양과 염소는 처음부터 양이고 염소입니다. 염소가 최고 수준의 선행을 하고 많은 실천을 했다고 해도 양이 될 수가 없고 양이 잘못을 범한다고 해서 염소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마음대로 살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양입니까? 아니면 염소입니까?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으니까 양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기대일 뿐이지 양과 염소의 구분은 오직 목자에 의해서만 되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비유는 ‘양은 이런 일을 한 사람이니까 우리도 양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양이 되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아버지께 복 받을 자로 택함 받은 신자의 사람됨이 그 행한 바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지극히 작은 자 ◉

 

35,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양은 곧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0절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의 본문은 우리가 이해하는 선행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자를 예수님 자신으로 얘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 고난과 핍박의 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환대하는데 예수님 스스로 고의로 그 같은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별 볼일 없는 자가 자신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을 고난과 핍박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참된 신앙의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이 곧 믿음이 이끄는 길임을 시인하며 그 길로 인도 받으며 견디고 인내할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시가를 아는 것이고, 이 앎과 신앙은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어떻게 대하는 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으로 목말라 하며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좇고 복음으로 살고자 하며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른편에 세움 받은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절)로 시작하여 자신들이 주를 위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영접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신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의도적이 아니며 의식적이지도 않고 내 안에 자리한 복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저들을 영접한다’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 복음이 이끄는 바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이렇게 했다’고 하실 때 ‘제가 언제 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라고 항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를 위해 행한 것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자기들의 행함을 무시하고 부인하자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참되다 할 수 없으며 자기 구원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거짓된 신앙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굳이 세상의 마지막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예수님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양과 염소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복음 안에서라는 관계 ◉

 

이러한 말이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핍박과 고난이 없는 편안한 시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사탄의 권세는 분명히 있고, 그 권세 아래서 유혹을 받으며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데도 사탄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에 고난도 핍박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해 경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고난과 핍박이 없는 것을 은혜가 넘치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잘 살면 복 받은 것이고, 예배당 건물 크게 지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로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핍박은 북한 같은 곳에서나 해당되는 말이지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회가 복음 때문에 함께 하는 관계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형제에게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자기 평안이 중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부인당하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에 ‘우리가 언제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며 자신들의 행함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신자를 고난으로 이끌어 갑니다.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가신 길은 보면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자로 함께 하는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며 다른 지체가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에 함께 할 관계에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고난에 대해 비웃고 비난할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한다면 우리의 신자 됨은 지극히 작은 자, 즉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마음으로 영접하며 그 길에 함께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복음은 복음을 만났을 때 그 참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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