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1.13 16:18

(159강) 몸과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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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26-3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26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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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설교>

 

◉ 실제적으로 경험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성경 ◉

 

 

성경을 보면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병 고침의 기적이 오늘도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침 받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병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심각한 병에 걸린 거의 모든 신자들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병 고침도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있습니까? 이 말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여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실천하는 작은 예수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감동을 먹고 구제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실천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의 실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고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초대교회처럼 재산을 팔아 나누어주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 중에 일부를, 그것도 내 삶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준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얘기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산다고 한다면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예수님의 사랑을 인간의 동정심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에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성경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 부활, 영광, 구원 이런 말들이 성경만 펴면 등장하고 우리가 수없이 듣고 말하는 내용이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듣는 그 모든 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문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 의식으로 굳어진 성찬식 ◉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지금의 성만찬 의식이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과연 예수님이 교회가 행할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깊은 생각 없이 교회에서 성만찬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본문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우리의 편리를 따라 대하는 것 밖에 안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의 자리를 가지셨을 때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합니다(26-28절).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교회에서 성찬식을 행함으로 실천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느낌을 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자주 행하는 교회 의식의 하나로 여길 뿐이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느낌을 갖기는 힘듭니다.

 

 

카톨릭은 성찬의 떡을 먹을 때 그 떡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는 피가 된다는 화체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개신교의 성찬식과는 느낌이 조금 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차이는 단지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지 성찬을 함으로써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실체적인 체험을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찬의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믿고 먹으며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마십니다. 즉 성찬에는 예수님의 몸이 있고 피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백 번 성찬을 행한다고 해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그 의미를 실제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성찬은 단지 하나의 의식으로 굳어져 있을 뿐이고 신자들 역시 성찬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많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 성찬 의식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찬 의식이 주의 몸과 피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성찬식에 대한 그러한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인해서 본문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우려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연합의 축복 ◉

 

 

그러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자신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몸과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영광된 존재로 부각되는 그 때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몸과 이름을 영광된 것으로 세워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영광된 존재가 된다고 해도 죄인으로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의 길을 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죄인된 자에게는 용서라는 길이 열리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주시면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몸으로 누리시는 모든 것이 제자들이 누리는 것이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저주를 받으셨다면 그 저주에는 제자들도 함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죽으심으로써 제자들도 함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는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과 연합됨으로써 누리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셨고 하늘로 가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신자가 누리게 될 축복의 사건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한다거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성취되어질 복된 사건들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고 행하실 이 일을 믿는 믿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몸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때문에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몸은 언약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몸과 피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이며 따라서 몸도 피도 언약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잔을 마심으로써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제자들에게는 죄사함의 은혜라는 놀라운 복된 사건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과 피는 제자들을 저주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죄사함을 얻게 하심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된 몸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제자들이 친히 목격하게 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제자들이 누릴 언약의 성취라는 복된 사건으로 다가올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떡을 떼어 주시고 잔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됩니다. 성찬식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느낌을 얻고 경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처럼 실제로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느낌을 가지거나 경험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단지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나를 저주에서 해방하셨고 죄사함을 얻게 하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는 우리를 부활과 생명이라는 영광된 존재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새 나라에 있게 할 것을 믿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성찬식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 성령과 연합 ◉

 

 

이것을 29절의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가르쳐주십니다.

 

 

떡과 잔을 주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했을까요?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자기 몸을 위해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는다는 것이 장차 자신들의 몸이 어디로 이끌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고난의 길을 가신 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몸에 연합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제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 21:18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19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그처럼 원하지 않는 죽는 길로 데려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성령이십니다. 29절에서 말씀한 새 것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영원히 몸과 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과 피에 연합되어 더 이상 자기 몸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가게 되는 것도 성령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오직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일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몸과 피에 연합된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 몸을 위해 사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피를 증거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에 연합된 복된 세계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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