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설교>
◉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다 ◉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일까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는 배신으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되어 온 것 중에 하나가 배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답을 내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말한 대로 인류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라고 할 만큼 배신으로 가득합니다.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신하가 왕을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여 흘러온 역사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도 어떤 사람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며 신의를 지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려도 될 만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겼기에 신의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경우에도 배신을 하지 않고 누군가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킬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내 중심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항상 내게 유리한 쪽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 쪽에 서는 것이 내게 큰 불리함과 불이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안다면 멀리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속마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서로를 신뢰하지 말고 의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에 대해 신뢰가 간다면 신뢰하면 되고 인간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구축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내 편은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누군가가 나로부터 등을 돌린다고 해도 분노와 섭섭함 보다는 그를 통해서 인간의 연약함과 함께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로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드린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문제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다 나를 버리리라 ◉
본문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굳게 맹세하고 장담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굳건한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쯤 되면 베드로도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또 다시 장담을 하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베드로와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예수님이 붙들려 가실 때 제자들은 도망을 치고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신앙의 문제에서는 섣불리 장담하지 말고 신중해라는 교훈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이 그처럼 뻔히 보이는 결론을 가지고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하늘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볼 수 있는 뻔한 결론을 가지고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오늘밤 네가 나를 버린다’는 말씀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 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은 배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밤 안으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형편이나 분위기라면 얼마든지 배신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이 붙들려 가는 심각하고 두려운 상황이 아니어서 단지 자신의 심정만으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는 장담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위협이 되고 불리한 상황이 되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에 ‘다 나를 버린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 나를 버린다’는 말씀 또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장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시는 분으로 장담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가운데서 다만 자기 심정만으로 장담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들이 단지 누구 말이 맞으며 누가 더 인간에 대해 잘 아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 흩어지는 양 ◉
31절 뒷부분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슥 13:7절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치고 흩어질 것임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붙들려 죽게 됨으로 인해서 목자를 바라보고 목자를 의지하던 양 떼들이 흩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목자가 붙들려 죽는 현실이 양 떼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따라서 양 떼들은 위험의 형편으로부터 도망쳐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다가올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버리지 않겠다며 장담을 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른 채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와 자존심과 자신들이 메시아로 믿고 있는 분을 버릴 수 없다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의리로 똘똘 뭉쳐 있는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신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는 자신을 향한 신념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는 이 같은 자기 신념이 무너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 떼는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2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참된 주의 나라가 시작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요?
슥 13:7절 하반절에 보면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작은 자들은 흩어진 양을 뜻합니다. 이들 위에 하나님께서 그 손을 드리우신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슥 13:8,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고 양이 흩어지면 하나님이 삼분의 일을 남기실 것이고 그들을 부르셔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은 예전에는 목자가 죽는 것을 보고 도망치고 흩어지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불 가운데 던져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새로운 자가 되어 부름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백성으로 여기시며 백성된 자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있는 믿음의 길로만 가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시작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32절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 갈릴리로 가심 ◉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신다는 말씀을 하실까요?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그 갈릴리에서 처음 부름 받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따랐던 것도 자신들의 의지였고 앞으로도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따르겠다는 자신감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너져야 할 육신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잘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하면 되는 나라는 주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주의 나라가 아니라 내 힘으로 살고 내 힘으로 믿는 나의 세계일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할 수 있다’라는 극히 인간적인 용어들이 믿음으로 가장되어 남발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감과 신념을 가지고 밀어 붙이는 것이 큰 믿음으로 인정받는 것은 주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나라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새롭게 그들을 부르시고 새로운 주의 나라를 시작하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새롭게 시작하실 주의 나라는 자기의 신념과 자존심과 힘이 무너진 나라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과 힘으로는 사탄의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심과 일하심을 믿는 나라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주의 나라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나라이고 죽음의 권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승리의 나라입니다.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갈릴리에서 처음 부름을 입은 제자들과는 다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부름을 입은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오셔서 다시 부름을 받은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의 제자들은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자기 힘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새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증거하는 사도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심히 약한 존재들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는 것처럼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죄로부터 승리한 새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시고 부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저주의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부르시고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은혜를 주시고 입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게서 나오는 것은 배신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믿음을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살아계심의 증거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가 늘 자신을 붙드시고 생명의 주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심을 믿기에 어떤 형편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홀로 자기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주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관리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을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든든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