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설교>
◉ 유다의 선택 ◉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자신이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버린 스승이 정죄 받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은 삼십을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하자 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놓고 돌아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거룩한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사실 이것은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스승을 배신한 사람의 자살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와는 무관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자살 이야기가 우리의 믿음 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지옥 간 이유를 자살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도덕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팔아 버린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판결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자기 행위에 대해 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은 삼십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은 삼십을 돌려준다고 해서 예수를 팔아 버린 행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양심의 가책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유다는 자신에 대해 크게 절망하면서 그 해결책을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침이 있었고 깊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죄에 대한 가책이라는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 죄로 인한 괴로움이 없다면 ◉
이처럼 죄는 우리에게 괴로움과 절망을 안겨줍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괴로움과 절망은커녕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면서도 뉘우침도 통곡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침이 있고, ‘내가 이런 존재 밖에 안된다’는 괴로움과 절망이 있을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처럼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통곡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와는 달리 예수님을 팔아 버린 죄가 없어서일까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다만 나는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고, 자신을 예수를 팔고 부인하는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과 길이 전혀 없는 막막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없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과 죄로 인한 깊은 괴로움과 절망으로 인해서 막막함을 경험한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님은 가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따라다닐 가치가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은 삼십을 받고 팔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죄를 보게 되고 뉘우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책임지는 길을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진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 값은 자신의 목숨으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죄와 상관이 없고 싶은 사람 ◉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유다의 죄로부터 자유로움을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죽게 되는 것은 모두가 유다로 인한 것인지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닐까요?
우리는 유다의 일을 대하면서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팔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유다고, 은 삼십을 요구한 사람도 유다고, 예수님은 넘겨준 사람도 유다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다만 유다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준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판 것은 가룟 유다지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한 대로 그들에게는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무시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성소에 던져 놓고 간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하며 성전고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전고는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예물을 넣어 두는 곳인데, 유다가 놓고 간 돈은 예수를 팔아 버린 부정한 돈이기에 성전고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하면서 성전고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은 삼십을 유다에게 준 자신들 역시 그들이 말한 핏값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예수님의 피와는 끝까지 상관없는 자로 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와는 상관없는 자로 남고자 하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은 말 그대로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목자의 가치는 은 삼십 ◉
나그네는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유대사회에서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처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한 예수의 핏 값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9,10절에 보면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은 삼십과 토기장이와 연관된 이야기는 예레미야서가 아닌 스가랴서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스가랴서의 내용을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슥 11:12-13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그들의 목자로 일한 것에 대해 좋게 여기거든 품삯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스가랴 선지자가 목자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한 것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을 위한 목자의 일을 귀하게 여긴다면 많은 품삯을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게 주거나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은 삼십을 달아 줍니다. 목자의 일을 종 한 사람의 가치로 평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보낸 하나님의 일을 그처럼 하찮게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 나에게 피의 가치는 ◉
하나님께서는 은 삼십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음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그처럼 세상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로 일한 스가랴 선지자의 가치를 은 삼십으로 여긴 것이나, 유다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값으로 은 삼십을 받은 것이나, 유다가 던진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은 이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피의 가치를 그처럼 하찮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유다처럼 죄를 뉘우치고 괴로움과 절망이 있다고 해도 죄의 책임을 자신이 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예수님의 피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또한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긍휼과 자비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자기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갖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고 복주시면 인생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물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잘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적 시각에서의 잘됨이 아니라 구원론적 시각에서의 잘됨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이 있는 신자에게 해당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무엇보다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죄에서 해방된 복된 것임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스가랴 선지자가 목자로 일한 것을 은 삼십으로 평가한 것처럼 우리에게 목자로 오셔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가치를 그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머리로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인지 아니면 나의 이름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