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2.01.29 13:04

(168강) 십자가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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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32-4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7324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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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설교>

 

◉ 절망과 갈등이라는 신앙 현실 ◉

 

 

사람들이 신앙에서 기대하는 것은 평안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인생이 평안해 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통해서 원하는 삶의 현실을 누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신앙으로 인해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은 평안이라기보다는 절망이며 갈등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왜 신앙이 절망과 갈등이라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죄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붙들린 우리가 매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나 실패만 거듭하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절망하게 되고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이 같은 절망과 갈등의 현실을 경험하지 않고는 신앙을 이해한다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을 인간의 선택과 열심으로 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안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주된 이유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절망과 갈등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그와 같은 현실에서 도망치고 외면할 것이 뻔합니다. 자신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서 절망과 갈등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선택이기에 사람의 선택과 열심을 가지고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람의 선택과 열심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실패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현실에 과연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복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현실은 조롱이고 비방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조롱과 비방을 받으시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길만을 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십자가의 현실은 보지 못한 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나의 소원을 내어 놓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현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아무 할 말이 없는 고개 숙인 자로 나와야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자들과 함께 서 있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그 같은 못남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난 줄로 착각합니다. 신앙생활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절망과 갈등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앙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실에서 절망과 갈등이라는 신앙의 현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세계에 대해 새로운 눈이 열리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신앙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 실패의 길 십자가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이것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정신 나간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절)는 말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역시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42,43절)는 말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심지어는 함께 못 박힌 강도들까지 이들의 희롱에 동참합니다.

 

 

이들의 희롱은 이스라엘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조차 구원 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힘없는 예수님에 대한 희롱입니다. 이들에게 힘없는 자는 메시야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힘으로 세워진 강한 나라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힘이 곧 진리였으며 그들이 소망했던 나라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힘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동안 당했던 설움과 고통을 보상 받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붙어 있습니다. 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을 죄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힘이 없는 자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힘이 없는 것이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는 실패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로마 사람에게는 금지되었으며 반정부, 반사회적인 죄를 범한 중죄인에게만 실행되던 사형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실패의 자리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은 이처럼 실패의 길을 가신 것이 됩니다.

 

 

이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과연 성공의 길이냐 실패의 길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일까요 실패의 길일까요? 답은 성공의 길이기도 하고 실패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성공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시각에서는 분명 실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한 인생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성공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원합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는 실패의 인생이 아니라 세상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성공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 역시도 그 같은 기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할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위를 위해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패입니다.

 

 

신자 된 우리가 바라봐야 할 실패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낮은 자리에서 빌빌대는 것을 실패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가지 못하는 것을 실패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십자가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로 인한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절망과 갈등 속에서 신자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나를 붙드시고 다스리며 이끌어 가시는 힘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시는 힘이 있음을 알 때 신자는 그 힘이 예수님이심을 알며 예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앙의 내용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붙드시고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연약한 나를 이끌어 가시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 시몬이 지고 간 십자가 ◉

 

 

32절에 보면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죄수가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밤새 심문을 받기위해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셨고 많은 매를 맞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길에서 만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여 간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에 비록 죄수가 아니라고 해도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는 것은 시몬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부하지 못한 것은 십자가를 지게 한 사람이 로마 군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 오늘날 신자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앙의 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는 우리 스스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서 억지로 지워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요 21:18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로 갈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같은 길은 애초에 베드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드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그 같은 길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띠 띠우고 우리가 원하지 않던 길로 데려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장악하여 내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에 마음을 두게 하시고 그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여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의 승리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는 말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천사를 동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심판해 버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힘의 승리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메시아를 통해서 그 같은 승리를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승리는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하늘의 참된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라면 십자가를 믿는 신자가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교회가 외적인 성장을 통하여 힘을 얻고자 하고 힘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것은 교회 스스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며,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는 마지막 때에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 길이 비록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며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붙드시고 이끄시는 길이기에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실패하지만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두려워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로 갈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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