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2.02.12 10:15

(170강) 죽으심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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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55-6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7556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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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설교>

 

죽음은 소멸을 의미합니다. 생의 종말이며 다시는 생의 자리로 되돌아 올 수 없는 영원한 마지막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에서 허무를 느끼기도 합니다. 꿈도 열정도 희망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죽음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죽은 자와는 더 이상 부모 자식이나 형제의 관계라는 것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는 현장, 즉 장례식장에서 어김없이 보게 되는 것이 슬픔과 애통입니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슬픔과 애통, 그리고 실망과 허무를 죽음의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인간들의 반응을 보면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죽음을 멀리서 바라본 여인들 ◉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던 많은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마태가 많은 여인들 중에 특별히 이들 몇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던 여인들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눅 8:2절을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악귀로부터 해방되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큰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고향인 막달라를 떠나서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귀를 쫓아내시고 병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좋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랐던 많은 여인들도 이 같은 이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마리아는 마 20장에 보면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청탁을 한 여인입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속히 예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이유에는 예수님으로 인한 아들의 성공에 대한 기대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자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기대를 두었을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떤 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즉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힘없이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른 많은 여인들의 심정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실망과 함께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일이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죽었으니 이제 다 끝났다’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이제 죽은 분으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더 이상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고, 병이 들어도 고침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예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여러분 여인들의 이 같은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마치 우리가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대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의 예수님으로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머리에만 박혀 있는 믿음일 뿐이지, 실제로는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적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의지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 실망할 것은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모든 기대를 예수님께 두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현실이 과연 그렇습니까? 조그만 일에서도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실망하고 낙심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이 아닐까요?

 

◉ 예수님을 장사한 요셉 ◉

 

57절에 보면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제자로써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여 시체를 가져다가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장사를 지낸 사람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대제사장이나 장로,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장사지냈다는 것은 예수님이 대한 요셉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렇지만 요셉에게도 예수님은 이미 죽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내면서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죽은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죽은 몸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고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이 같은 행동을 예수님에 대한 봉사와 섬김으로 칭송하면서 요셉처럼 예수님을 위해 물질로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장사하는 요셉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넣는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죽어 버린 예수를 바라보면서 슬픔과 애통만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하고 돌아간 후에 그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정성을 보였다고 해도 예수님을 죽은 자로 여기고 자기 홀로 사는 삶이라면 생명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보면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장사한 것 같은 정성과 섬김을 요구합니다. 물질로 정성을 보이고 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삶을 보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홀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 삶에 예수님은 죽고 없습니다. 자기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정성껏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넣는 요셉처럼 말입니다.

 

◉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불안 ◉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빌라도에게 와서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63,64절)라고 요청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를 ‘주’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권력 앞에 머리를 숙이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에 집착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권력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사들로 하여금 사흘까지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을 내려 달라고 부탁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흘 후에 살아나리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염려한 것은 혹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하여 숨기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오해할 것이고, 그것은 더 크게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군사로 하여금 사흘까지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분명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고자 하지 않았고 믿을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그 말로 인해서 행여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며 자신들을 위해서 무덤을 지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 싼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반응입니다.

 

◉ 우리에게 예수님은 살아 계신가? ◉

 

여러분께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고 없는 분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생명으로 살아서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고 생각에만 머물고 있는 이론도 아니며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존의 자기 생명을 위해 살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위해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나의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다면 나의 일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생명과 부활의 주가 아니라 다만 죽은 예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께 예수님은 죽고 없는 분입니까? 아니면 부활의 주로 여러분을 다스리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까? 이론으로 답할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을 삶을 보면서 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나를 확대하고자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나를 확대하는 일에 몰두한 채 살아가면서 겉으로만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과 생명의 문제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으로만 대할 뿐이고 실제적인 삶은 철저히 내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명을 위해 다가오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나의 일을 도와주는 예수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생명을 향한 소망이 없이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직 생명을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생명에 마음을 둔다면 여러분께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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