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 나 중심인 종교 ◉
종교의 중심에는 ‘인간’, 즉 나가 있습니다. 중심에 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신앙은 나를 위한 것으로 귀결됩니다. 신이라 이름 하는 존재를 찾고 부르고 섬기고 머리를 숙이는 모든 것도 그런 행동들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있다면 자연히 신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관심이라고 해봐야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받을 수가 있는가가 전부일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받기만 하면 신을 찾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신앙문제에서도 다른데 관심을 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 년에 걸쳐 마태복음을 통해서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에 관심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마태가 증거하는 예수님은 인간의 관심을 끌만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인간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를 위해서 오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전혀 관심두지 않는 문제를 끄집어 내셨고, 또한 그것을 넘어서 인간이 불편해 하는 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루시면서 인간과 대립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종교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분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단지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가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마태복음의 예수님, 아니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은 관심에서 밀려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을 끝내는 오늘 우리 자신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지금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중심에 ‘나’가 굳게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마태복음은 15절이 결론이고 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의 결론은 15절이 아니라 20절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15절과 20절은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다른 길을 달려간 두 부류의 사람 ◉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 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고서 어디로 가는가 하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 그 모든 일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하여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라고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가르친 그대로 말함으로써 유대인들 사이에 ‘시체 도적설’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15절까지의 내용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즉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움직이는 이것이야 말로 부활도, 생명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다만 세상에서의 자기 위치와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탐욕인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자인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지 않고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은 아마 무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시체를 도적질 해갔다는 말이 총독이 알게 되면 그 책임을 면하도록 자신들이 말해주겠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회유로 인해 돈을 받고 ‘시체 도덕설’를 퍼뜨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시체 도적설’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인간에 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내 중심에 자리한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11-15절이 우리의 현실이고 전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대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중심에 하나님이 있지 않고 자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탐욕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마음을 둘리가 없습니다.
부활의 주를 바라보며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해서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이름 하는 종교일 뿐입니다.
◉ 갈릴리의 의미 ◉
16절에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과 함께 지시하신 말씀을 듣고 갈릴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절)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대개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생각하는 것은 선교의 사명일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제자로 삼아’‘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에 중점을 둠으로써 선교를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는 신자로써 해야 할 일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굳이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이게 하셔서 그 곳에서 선교의 사명에 대한 말씀을 남기셨다는 것이 뭔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선교의 사명을 말씀을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이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말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선교의 사명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의미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대제사장이나 장로 서기관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고 죽인 그들 앞에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시면 멋있는 복수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부활의 몸을 보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 하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것이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면 그 권세 앞에 세워진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순정치도 않았습니다. 세상이 볼 때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권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눈에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는 권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무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로 인해 세상에 등장하게 될 새로운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세상이 인정할 만한 물리적으로 모습으로 달라져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의 권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권세는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권세 아래 복종하는 무리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세계, 즉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18-20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같지 않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가서 전하고 제사로 삼아 가르치자’라는 선동적 의미로 이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나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비교해 보면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권세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중심지였고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한마디로 신앙의 중심이고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에 비해서 갈릴리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가난하며 하나님과도 거리가 멀다고 여겨질 정도로 초라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루살렘에서 나와 갈릴리에서 제자를 만나시고 마지막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 복종하며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예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새 나라의 시작 ◉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다는 것은 세상과 같은 싸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나타내고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과 같은 부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복종하고 소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으면 안됩니다. 세상의 힘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는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교회로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좇는 교회로 존재해야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분임을 가르쳐야 하고, 우리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께 복종하며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이 권세가 세상의 그 어떤 권세보다 크고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이 권세 아래 복종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새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새 나라에 부름 받은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새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