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12-19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1219.mp4
<본문>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설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성경대로 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되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뜻을 담고 있는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하나님만 이루십니다. 이것은 누구도 개입하거나 도울 수 없는 하나님만의 독자적 행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도와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일하심으로 성취됩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교회가 말하는 부활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는 시각으로만 볼 뿐이지 하나님이 이루시는 뜻과 계획 앞에 인간의 뜻과 계획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신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3,14절)는 말로 시작하여 부활에 대해 증거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은 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권세에 의한 결과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권세자의 일하심에 의한 결과라는 뜻이며 권세를 가진 분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권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당연히 권세자의 일하심 또한 없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죽은 자인 인간만 존재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기에 권세자를 믿는 믿음은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도 없게 되는 것이고 바울이 전파하는 것도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이나 믿음의 중심에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를 부정했다면 그것은 아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당시 고린도 지역에 팽배했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스 철학 중에 플라톤 철학이 있는데 이들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영육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육체의 죽음에 의해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은 영혼이 또 다시 육체에 갇히는 사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육이원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은 부정해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요? 물론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있다 없다’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믿음도 헛것이라는 말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면서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생각에 의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참된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냥 건너뛰어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됩니다. 사실 15장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믿고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마나한 당연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 없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사람의 생각과 일치된 방식으로 살면서도 단지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믿음 있다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믿는 것이 어떤 믿음인가를 아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된 하나님의 일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도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도 인간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것도 인간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죽음이라고 해석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결론은 인간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놓치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인간이 누릴 혜택만 강조되는 것입니다.
시 135: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백성으로 선택받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은혜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심으로 영광 받기 위한 선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 죽으심, 부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06:8절을 보면“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라고 말하고, 시 98:1절에서도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부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은 사라지고 영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도 육신이 아닌 영혼이 부활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는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을‘이단’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활에 초점을 둔 자들의 논쟁입니다.‘누가 옳으냐’의 싸움에 매몰되어있는 것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정당화 하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생을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기를 위한 삶에 몰두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믿음은 인생을 죽음 이후로 계속 연장시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끌어 당겨서 예수 믿으면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결국 믿음 있음과 없음의 차이가 죽음 이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활도 모르고 믿음도 모르는 것입니다.
롬 8:11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으라는 당부의 말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곧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시각에서 가르치는 것일 뿐이지 부활의 참된 의미와 멀어져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죽을 몸도 살린다는 것은 몸으로 존재하는 인간 자체가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기에 죄가 나옵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죄의 존재이며 죽은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본다는 뜻이고, 누구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단지 몸의 죽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갇혔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 가운데 갇힌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중대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부활에 갇힌 기독교인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고 부활을 훼방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주변에서 죽은 자를 살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 중심의 인간 편의적인 생각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믿는다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활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중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에 갇혔다는 뜻입니다. 죄에 갇혔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몸이 살았다 죽었다의 여부를 떠나서 모든 사람은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단지 지식의 수준에서 말하는 부활을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든 있다고 하든 인간의 현실이 죽음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의미의 사건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전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은‘예수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다시 사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은 믿음도 복음도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분명 우리의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활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해 분명히 생각해야 할 중점입니다.
이것으로 현대 교회가 말하고 생각하는 부활의 맹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부활, 내 몸의 부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나 있다고 하는 사람이나 인간이 중심에 자리한 부활만 상상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으로 향한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죽은 자인 심판의 존재가 어떻게 죽음에서 사는 생명의 존재가 되었는지가 증명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한 서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생생한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 증거로 우리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죄에 갇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의인 된 것을 선포합니다. 이 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이 담겨 있으며 그 모든 일은 창세전이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신이 확정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아래 있음을 믿는 것이기에 무엇을 하든 자기의 행함으로 되는 것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로 인해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된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으로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바란다면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고 믿음으로 여겼던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의 처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 가둔 죄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가 해결된 복의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죽은 후에 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건짐 받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