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29-3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2934.mp4
<본문>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설교>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하기에 스스로 죽음을 원하거나 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편으로 보면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살고자 하는 자기 애착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기에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게 이용하는 것 중에 신앙이 있습니다.
물론 자기 애착심에서는 신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다만 종교가 나올 뿐입니다. 즉 살고자 하는 애착과 의지로 찾는 신은 모두가 우상이며 그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자기 애착에 붙들린 인간은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이것이 이 세대에서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단순한 교리 충돌의 결과가 아닙니다. 유대인의 교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인한 충돌로 세력이 약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이 사탄에게 어떻게 지배를 받고 있고 하나님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을 십자가를 말해야 하는 이유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십자가에는 거부감이 없습니다. 구원받고 천국가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당연히 복음으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자기 구원, 즉 자신을 살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애착에서 나온 왜곡된 신앙, 즉 종교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기를 위한 십자가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바울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는 말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신의 존재입니다. 신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존재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임을 생각하면‘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주장은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의지와 배치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도의 생각이며, 이러한 생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을 두고 신앙이라 할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아데미라는 여신을 섬겼습니다. 아데미는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이러한 신을 섬기는 종교가 에베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으로 신을 찾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행 19:23절에 보면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고 말합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바울로 인해 생업에 지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자신들의 풍요한 생업에 위협이 되는 도를 전하는 바울을 성토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다른 무엇보다 바울의‘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말로 인해 여신의 모형을 만드는 자신들의 일이 천한 것으로 전락될 위험이 있고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그 위엄도 떨어질 수 있다는 말로 선동한 것입니다(행 19:24-27).
데메드리오에게 아데미 여신은 자신의 풍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의 풍요는 더해질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자신의 풍요에 지장이 있게 된 것입니다.
행 19:20절에서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고 주를 따르게 된 것인데, 결국 데메드리오에게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는 자신의 풍요를 위협하는 문제이고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의 복음의 위치입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인해 온 시내가 요란해지면서 바울과 같이 다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붙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존 문제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 바울이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형편임을 생각하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 생존 문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다만 말씀에 붙들린 자로서의 행보였던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을 살리는 분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바울이 자신에 대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주고 보호해주시는 귀한 존재라는 시각이 있었다면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자신이 행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도로 하나님께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신자를 특별히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행복하고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원하고 그런 하나님을 믿고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고자 하는 인간 본능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이고, 이러한 본능에 부합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거짓이며 사기입니다.
여기에는 죽이는 하나님은 없고 살려주는 하나님만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하나님인 것을 생각하면 에베소에서 만연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는 것이나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건, 그리고 지금도 교회에서 복음이 외면 받고 배척당하는 현실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예수님이 계셨던 세상이나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세상이나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면 우리 역시 당시 바울이 세상에 대해 느꼈던 위험들이 느껴져야 합니다. 세상은 복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져야 하고 자신의 생존과 풍요를 위해 신을 찾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를 믿는 것은 배척과 외면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느낌과 긴장감이 없이 예수를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알지 못한다거나 세상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30절에서 바울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때를 위험에 던져진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울과 같은 특정인에게 국한된 위험이 아니라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처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신자에게 세상은 위험하다는 인식이나 느낌이 없다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지 복음 때문에 함께 할 뿐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죄인 된 자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교제하는 것이 만족의 전부가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풍요나 행복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바울의 상황이 나아진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믿는 자가 많아진다 해도 세상이 바울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상황으로 뒤바뀌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바울이 처한 상황에는 관심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으로 날마다 밀어 넣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하나님이 혹시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논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살고자 하는 본능보다 부활에 대한 소망과 확실함으로 인한 가치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부활이 없는 삶은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해도 부활이 없으면 그것은 곧 소망 없는 종말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몸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게 합니다. 육신은 흙이고 흙으로 돌아갈 뿐인데 하나님의 언약은 부활의 몸이라는 새로운 몸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바울에게는 매일매일이 죽음의 위기로 다가온다 해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죽는다 해도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추구한 바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신자란 진리와 생명을 아는 자로 영원한 것에 대한 목표와 확신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자신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오고 교회에서 어떻게 행하는가를 떠나고 영원한 것에 대한 목표와 확신이 있는 자로 자기 풍요라는 세상의 유혹에 타협하기보다 하루하루를 죽는 것이 당연한 자에게 허락된 시간으로 살아가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맹수와 더불어 싸운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싸움을 뜻합니다. 자기 이름,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 해도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맹수와 더불어 싸운 것을 하나님이 의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것도 부활을 알지 못한 자들은 끝까지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세상에서의 인생이 전부이고 따라서 한번 있는 인생, 풍요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모든 의미와 목표를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말한다 해서 부활을 알고 믿는 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활에 무지한 자가 곧 우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한 것은 날마다 죽음의 자리에서 종말의 삶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의 자리입니다. 살고자 하는 집착과 본능으로 자신의 풍요와 번영을 보여주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전하는 자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은 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신자의 영광이고 목표입니다. 때문에 부활의 소망과 믿음으로 존재하는 신자에게는 자기 번영과 풍요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로 사용되는 인생일 뿐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신자에게서 마땅히 나타나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