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29-3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2934(3).mp4
<본문>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설교>
하나님은 추상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않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에 뜻을 두고 일하시는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낱낱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 모든 것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세상에 어떤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는지를 아는데 있어서는 추상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않도록 온전히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간섭하신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로 가득한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분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3:6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이 친히 간섭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아는 것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신앙으로는 독생자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긍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체험과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나 일하심을 확인하고 그것을 증거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간섭은 인간의 소원성취를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을 배우고 깨달으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임을 아는 그것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몸으로 부딪히는 현실로 인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에서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부딪히며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이 위험에서 벗어나 무사하고 안전한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을 생각했다면 그것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상태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육신의 죽음에서 멀어지거나 위험이 없는 평안의 상태를 하나님의 간섭이나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이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죽음의 이후의 세계가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죽는다 해도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벗고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았던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는 다른 삶의 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절)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현실을 악한 동무가 있어서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상태라면 악한 동무라는 존재에 대한 감각이 없을 것이고 선한 행실이 더렵혀지고 있음에도 그 사실 또한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악한 동무에게 속고 농락당하고 더럽혀지는 형편에서도 그 같은 자신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의 이 말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옵니까? 우리에게는 악한 동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못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동무를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나에게 친절하면 좋은 사람이고, 반대로 친절하기는커녕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보는 세상 현실은 악한 동무가 있어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동무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속임을 당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속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 또한 악한 동무와 같은 생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한 동무를 분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자기 시각이 기준이 된 판단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악한 동무의 특징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한 행실이고 선한 행실이 더럽혀지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기로는 인간에게서는 선한 행실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항상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 5:16절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착한 행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행실과는 다릅니다. 이웃으로부터 그 성품과 행동을 인정받을 수 있는 착한 행동을 의미하는 행실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착한 행실은 신자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비추는 것 또한 세상에 감동을 주는 착한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빛을 비추는 착한 행실을 신자 된 자가 행해야 할 윤리적인 착한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다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자의 가치와 믿음의 증거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저주의 인간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악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은 윤리적인 착한 행동의 여부가 기준이 되어 판단될 뿐입니다. 이것이 악한 동무입니다. 믿음을 인간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34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인간을 위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를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신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셔서‘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선언해 버리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 신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진정한 소금과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빛이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는 말씀은 신자가 빛이 되는 행실을 실천하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착한 행실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과 가치와 기쁨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활동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예수님께 양식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위험한 상황이 되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죽게 하실 때 죽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태도를 ‘날마다 죽노라’고 담대하고 당당히 말하는 바울에게서 본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자기 영광과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에 예수님과 일치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영광과 가치와 기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됨에만 모든 뜻이 향하게 되는 것을 선한 행실이라고 했을 때 이 행실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악한 동무는 세상으로부터 환영과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동무에게 속게 되면 세상과 같은 길로 가면서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회를 다니고 구제와 선교, 봉사 등등의 하나님이 기뻐하실 신앙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악한 동무’라고 표현했을까요? 동무는 친근한 관계에서 교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악한 존재라면 설령 교제하는 관계에 있다 해도 단절할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동무라고 하는 것은 악함을 분별하지 못하고 동무처럼 교제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악함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이 없기에 속이고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무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는 세상 현실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바울과 다른 현실, 다른 관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에도 관심이 멀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단언하며 말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에 우리 마음이 끌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에는 맹수라고 할 대상이 있습니까? 악한 동무에게 속지 말라고 하는데 악한 동무에 대한 경계가 있습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이 우리의 삶이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물음으로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바울과 같은 현실감이나 관심사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악한 동무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고, 관심사는 돈과 자식으로만 향해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3:13-15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악한 자가 있고 속이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속는 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를 악하다고 합니다. 속는 자는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될 것 같습니까? 속이는 악한 자입니까? 속는 어리석은 자입니까? 아마 속이는 쪽도 속는 쪽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신자라는 자기 존재 가치가 손상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까지 십자가가 아닌 자기 가치를 붙들고 있는 악한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현실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 주셔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라는 바울의 말에서 자신이 악한 동무가 되어 동무를 속고 속이는 현실에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기에 인간의 뜻과 희망사항을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써 노력하고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천국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피의 공로와 은혜는 필요 없고 인간이 잘하면 된다는 악한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딤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의가 우리의 의가 되어 구원에 있게 한다는 사실을 배웠고, 확신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악함과 가치 없음을 자각하고 저주의 형편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으로 건져내시며 생명으로 끌어가신다는 사실에 온 마음이 향하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가치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가치를 둡니다. 때문에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거나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설령 복음을 안다 해도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고 자부하거나 자신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끌어갑니다. 그냥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을 속이고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와 우리를 동질화시켜서 끌어갑니다. 그래서 ‘도무지 구원 될 수 없는 나’‘저주 받을 나’를 자각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그들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자는 배우고 확신한 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거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떠날 수 없는 영원한 자리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한 속성은 항상 자기의 가치가 인정되는 곳을 찾아가기 때문에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십자가에 거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빠지고 예수의 공로만 높이는 것이 선한 행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