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35-41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3541.mp4
<본문>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설교>
세상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과학과 이성과 경험으로는 부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환상이고 몽상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은 믿음의 핵심입니다. 누구든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이 없다고 부정한다면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닌 것으로 배척됩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부활이 있을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면 그는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활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부활의 믿음, 부활의 세계는 자기 집착에서 발산되는 자기 긍정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신 승리자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사망의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 부활을 위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믿음으로 인정될까요? 자기 집착과 자기 사랑에서 발산되는 종교의 틀에 갇힌 믿음일 뿐인데 그 믿음으로 부활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믿음으로도 구원 되고 부활된다면 교회를 찾아서 예수를 믿는다는 한마디의 말로도 신자로 인정되고 부활 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가치를 확보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누구신가를 증거 하면 됩니다. 예수의 부활을 말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부활합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예수님만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증거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인간의 부활에 중점을 두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가 예수를 믿는 신자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부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21,22절에서 바울은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 안에서 부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삶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하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고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아담에서 모든 인간은 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망을 이길 수 없는 인간에게는 부활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의 부활을 말한다면 거기에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 가치도 자격도 없는 사망의 전재라는 사실이 선명히 각인된 상태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부인은 고사하고 여전히 자기 몸에 대한 집착 가운데서 부활을 꿈꾸기 때문에 부활의 몸 또한 인간의 욕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35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향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축하고 지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상식과 이치와 논리와 과학 등등의 모든 것을 총 동원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고 사실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다 했을 때 따라오는 의문 중의 하나는‘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런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의문이 없습니까? 부활은 사실로 믿는다 해도,‘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에 대한 의문들은 많습니다. 골자는‘사람이 죽으면 죽었을 때의 몸 상태와 모양 그대로 부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린애로 죽으면 어린애로, 노인으로 죽으면 노인으로, 장애인으로 죽으면 장애인으로, 병으로 죽으면 병들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그대로 있는 상태로 부활하셨다(요 20:27)는 것을 근거로 해서 죽을 때의 몸 상태 그대로 부활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또 반대로 부활의 몸을 영광의 몸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몸 상태가 모두 완전하게 복원된 상태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닌 몸으로 부활하고, 병들어 죽었다 해도 아주 건강했을 때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몸으로 죽었다면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일까요? 생존하여 성장했을 때 가장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부활할까요?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있는 몸을 영광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이용하여 자기 부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의 문제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기 몸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부활의 몸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았다 해도 다시 죽었습니다. 때문에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알고 있는 부활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수준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상상하는 나사로의 부활의 몸은 죽었을 때의 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부활을 인간의 존재가 계속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따라서 마르다는 부활을 잘못 이해했던 것이고 지금의 인간들이 이해하는 부활과 부활의 몸 역시 마르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 17:15절에 보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깰 때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뜻합니다. 죽음 이후에 주의 얼굴을 뵙게 되는 주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고 주의 세계에서는 주의 형상만으로 만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 세계에 들어갔다면 자기 형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가 계시는 주의 세계를 사모하는 믿음임을 전제한다면, 부활의 몸을 궁금해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 65:4절에서도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주께서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에게는 주의 뜰에 있는 자기의 영광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신이 거하고 있는 주의 집,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이 만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주를 향한 관심만 있는 것이 주의 집에 거하는 신자의 특징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믿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영광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이 만족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부활 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자기 부활을 희망하기에 부활의 몸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몸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6-38절)고 말합니다.
바울은‘죽은 자가 어떤 몸으로 부활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실 부활의 몸이 설명으로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 일은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더 적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기까지 한 경험이 있는 사도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부활의 몸은 설명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의 몸 역시 부활의 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근거로 해서 신자의 부활의 몸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결국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자기 몸의 영광과 가치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표적으로 파벌의 문제나 우상과 은사의 문제 중심에는 자기 몸의 가치와 영광에 집착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누구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은가?’‘어떤 은사를 받은 것이 더 나은가?’라는 다툼들이 자기 몸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은 씨라는 형체는 사라지고 다른 형체로 살아난다는 것을 비유로 해서 인간의 몸은 사라지고 썩어질 형체일 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몸은 장래의 부활의 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의 몸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기 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은 타인의 몸과 비교하여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차별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뿌려진 몸, 즉 형체는 죽음과 함께 썩고 사라질 흙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몸, 육체이기 때문에 현재의 육체에서 부활의 몸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와 다른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인가는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알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자에게는‘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음으로 자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주의 집에서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는 것이 만족이 되는 것이고, 부활하신 주의 형상이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활로, 자신의 부활의 몸으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부활의 내용임을 생각하면 현대 기독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9-41절도 몸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육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39절).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가 다르지만 어떤 육체를 가졌다 해도 결국 죽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전 3:19절에서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이나 새의 육체보다 사람의 육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으신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는 같은 피조물의 육체일 뿐 어느 육체를 두고 더 낫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육체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자기의 육체를 가지고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자랑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코미디와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육체의 영광에 중점을 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살아서도 영광 죽어서도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선동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거짓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거짓의 세계에서 나를 향한 집착에 묻혀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을 빙자하여 거짓을 보지 않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무엇보다 내 자신이 부활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부터 생생히 인식되는 것입니다.
부활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 부활의 몸에 관심 두는 것은 자기 몸을 위해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관심 둘 것은 자기 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몸을 위해 사는 악함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며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바울은 영광이 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속한 형체도 있고 땅의 속한 형체도 있는데, 하늘의 속한 형체라고 해서 영광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름을 말합니다(40,41절).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몸의 영광과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몸의 영광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영광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이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영광은 예수 안에서 동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