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42-4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4244.mp4
<본문>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설교>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의 소망이나 관심 두고 있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 관심과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 목적과 이유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으로 증거 되는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은 철저히 무시되고 묵살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는 믿음이 있는 자만 구원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그 믿음이어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고 내가 그 믿음 가운데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고 십자가를 믿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유일한 신이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쉽게 답하겠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늘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눅 18: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인자가 오셨을 때 세상은 아예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는데 세상이 점점 악해지면서 믿음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세상에는 단 한 번도 믿음이 있었던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믿음이 없다는 현실을 부인합니다. 믿음을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믿음이 귀하다는 뜻이지 믿음이 아예 없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만약 믿음이 없음을 인정한다면 자신 역시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열심과 행함이 보일 것이고, 그것이 믿음의 덕목으로 비춰지면서 믿음 없는 현실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을 떠날 곳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인자가 다시 오시는 것은 세상을 끝내고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마지막 작업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자가 다시 오신다는 것과 부활이 믿음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면 당연히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생에 참여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 말했을 때 세상이 알고 있는 기존의 믿음과 충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로 도무지 융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자신이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은 분명 달갑지도 않고 생뚱맞은 내용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것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본문의 바울의 말이 실제 자신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도 우리 지식과 이해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부터 먼저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세상에는 믿음으로 산다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믿음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나 자신의 믿음도 부인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충격과 긴장으로 다가와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별 다른 반응이 없다면 아예 믿음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본문에서 바울은“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절)고 말합니다.
바울은 심고 다시 산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심는 것은 육의 몸, 다시 사는 것은 신령한 영의 몸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육의 몸이 아닌 영의 몸으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이 구별됩니다. 믿음은 영의 몸으로 사는 것, 믿음 아닌 것은 육의 몸으로 사는 것, 그렇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예수 믿고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입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예수 믿고 죽으면 나중에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믿음의 문제는 기존의 몸에 대한 단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몸으로 세상을 살다가 죽은 후에는 다시 내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표방하는 전통적인 천국관이며 부활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자는 육의 몸에서 새로운 영의 몸으로 바뀐 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육의 몸이 부활하면 영광의 몸인 영의 몸으로 변화된다고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육신이 하늘 영광에 걸맞은 몸으로 변화되어서 천국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도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로 알던 사람을 계속 동일한 관계에서 알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육신의 몸이지 영의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의 몸에서 영의 몸으로 바뀌었다면 육의 몸은 사라지고 영의 몸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영의 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육신 그대로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현재가 아닌 죽음 이후에 있을 장래의 문제로 밀쳐놓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흥미를 가지고 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육신에 관심이 있고 육신으로 하는 일들이 복이 되어 자신의 유익으로 돌아오는 것만 원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적인 영의 몸 따위는 도무지 관심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교회를 다니고 적당히 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신앙생활로 여기고 구원에 대해 안심하려는 일종의 취미로서의 종교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이기에 믿음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구원은 육의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육이 몸은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입니다. 이 몸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신령한 몸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영의 몸이 어떤 몸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해도 여전히 육의 몸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본인에 대해서는 미움이 있어야 하고 반대로 영의 몸을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의 모든 것이 육의 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육의 몸, 즉 육신으로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 믿음으로 인정되고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의 여부 역시 육신을 중심으로 판단되고 평가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의 몸을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전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이름 하는 곳에서도 육신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현재이기에 다른 종교와 같다는 평가에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행한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부인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의 행하심이 능력이 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을 현실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믿음 안에서 육의 몸을 다만 썩어질 죄의 몸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죽음 이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있게 되는 현상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는 신자의 현실로 자리해야 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고 신령으로 몸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현실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육의 몸으로만 살면서 믿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고전 12:12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몸은 하나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만 몸이라는 것입니다.
엡 4:4-5절에서도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 몸을 가지고 활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몸이 하나라는 말이 인정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세상의 시각일 뿐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교회도 각자 개별적으로 자기 몸으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개별적인 자기 몸으로 서로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이며 비교하고 우월감으로 다투는 것이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신령한 몸은 우리의 몸이 신령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것이고 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다시 살아난 것이고 하루하루 이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이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느끼고 실감하는 것은 육의 몸, 내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알게 되는 것은 육의 몸은 매일 같이 썩어질 몸으로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의 몸에 대해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시고 따라서 육에 몸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몸에 소망을 두게 하는 것도 성령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바울은 육의 몸으로 사는 것일까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일까요? 바울이라고 해서 육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던 몸 그대로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도 없습니다. 십자가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목격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무엇을 근거로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지 우리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기준은 성령입니다. 자신을 죽어야 할 죄인으로 보게 되고, 육신 또한 의지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되는 모든 것을 성령이 자기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육신으로 살았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 육신을 신뢰한다면 성령 받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사는 것이지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산다는 것은 거룩하고 선한 것으로 평가되고 인정되는 행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은 썩어질 가치 없는 몸이기에 신뢰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름 받은 사실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아닌 주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께서 이뤄주심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보는 것이고 자신에게 안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육의 몸으로 사는 것이며 당연히 믿음으로 인정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낮아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하지만 육의 몸이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고 썩고 무시 받고 병든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이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신자의 역할입니다. 이 역할을 하게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몸이 죄의 몸이며 땅에 속한 죽을 자임을 지적하면서 영광된 그리스도의 몸만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 안에 말씀이 있고 말씀이 역사하는 현실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육의 몸은 흙에 속한 죄의 몸이라는 말씀대로 그것이 곧 나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이 낮은 자리에서 주만 신뢰하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를 다스리며 낮은 자리로만 끌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육의 몸으로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때문에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