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6:5-9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0509.mp4
<본문>
5.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설교>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그의 생각이나 삶의 모습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모든 것이 복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만 복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복음이 나옵니다. 바울의 생각이나 모든 말이 자신에게 초점을 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복음이 중심이 된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분위기와 상황과 주어진 형편에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을 말하게 된다 해도 모든 생활이 복음의 정신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복음이 전부였던 바울의 말은 우리의 문제를 보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는 우리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가를 바울의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깊이가 어떻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깊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소위 인격의 성숙에서 찾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성숙된 인격, 그래서 좋은 성품과 인간됨을 보여주는 것을 깊이 있는 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것을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 도무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결과로 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인간됨을 안다면 인격의 성숙이라는 듣기 좋은 헛된 말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신앙이 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바울의 신앙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막연하게 ‘바울이니까 신앙이 깊을 것이다’라고 추측하여 말한다면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측으로 말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롬 5:20절에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임을 생각해 보면 은혜가 더욱 넘치는 그것이 신앙의 깊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은혜가 더욱 넘치는 곳이 인간의 선함과 자랑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죄가 더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죄로 확정되어 드러나고 어떤 인간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주의 존재라는 사실에만 붙들릴 때 은혜가 은혜 되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깊이는 자신에게서 죄의 어떠함과 그 깊이를 깨닫고 도무지 가치와 가능성을 둘 수 없는 낮은 인간의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깊음은 죄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가치도 두지 않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깊음을 우리의 상식과 이해로 접근함으로써 지성적이고 성품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5,6절에서 바울은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15장까지가 신앙에 필요한 중요한 내용이고, 16장부터는 편지를 마치면서 통상적으로 하게 되는 인사말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15장까지는 교회의 문제와 신앙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여러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16장에서는 그런 긴장과 심각함은 모두 사라지고 사적인 부탁과 함께 문안하는 말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에 가고자 하는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그리고 후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를 부탁하면서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야 하는 자기 사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 개인의 일정이고 형편입니다. 비록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니고 있지만 자신이 갈 곳으로 보내어 달라고 당당하게 부탁하는 말을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선교를 명목으로 돈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나는 선교 한다’는 것을 내세워서 선교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거나 교인들이 헌금하여 도와야 하는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과연 복음 전하는 것을 교회에 돈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이나 권세로 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고전 9:7절을 보면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경제적 도움을 거부하고 쓸 것을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도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고 참은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고전 9:12).
18절에서도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바울의 말은 교회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는 굳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갔을 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보내어 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할 때 붙잡지 말고 보내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다닐 때 필요한 경비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떤 생각과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앞의 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이 앞, 뒤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면 끝까지‘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입장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도움 받을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바울이 다시 도움을 부탁하는 것은 말을 쉽게 바꾸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복음이 전부였던 사람이고 오직 복음에 매인 자로만 살았던 바울이란 점을 먼저 생각한다면 본문을‘왜 말이 앞, 뒤가 다른가?’라는 의문의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규칙이나 일률적인 행동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복음을 안다면 이런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말에 대해서도‘자신이 한 말은 지켜야 하고 한번 한 말은 바꾸지 않는 것이 복음을 아는 신앙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입장에 따라 자신의 유리함을 위해 수시로 말을 바꾸기도 하고,‘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변명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지 말 바꾸는 것을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항상 자기중심에서 자신의 유리함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복음에서 벗어나 자신만 바라보는 잘못됨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은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괄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말을 할 뿐입니다. 교회의 도움 받을 권리를 쓰지 않겠다는 것도 복음에 의한 말이고, 자신이 갈 곳으로 보내어 달라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 또한 복음에 의한 말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들이 바울을 돕는 것을 복음을 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바울이라는 사도를 돕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에 따른 자유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도와야 하는 의무나 책임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만약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교회는 자신들이 사도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며 떳떳해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에 따른 결과를 자신들이 바울을 도운 공로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도운 일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도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바울은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연보를 매주 첫날에 각 사람의 수입을 따라 모아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연보하는 교회나 바울 개인의 편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복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매 주 첫 날에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음으로써 하나님이 수입을 주셔서 먹고 마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은혜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연보를 하는 사람이나 연보를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복음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뭔가를 하고 하지 않는 행동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바울을 끌어가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자존심이 아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복음으로 인해 유익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이 자신을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경비를 부탁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해서 돈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바울을 보내면서 필요한 경비를 돕게 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이 바울을 도움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7-9절을 보면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지나는 길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얼마동안이라도 그들과 함께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나 상황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에서라면 고린도 교회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제가 있던 교회이고 사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하면서 에베소가 비록 바울이 복음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큰 문이 열려있지만 자신을 대적하는 자가 많음을 언급합니다. 아마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고 형편이었다면 무엇보다 내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생각하며 좀 더 좋은 여건의 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대적이 있고 호의적이지도 않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대적이 많다는 것 또한 복음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큰 문이 열린 것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매인 것과 복음을 말하되 여전히 자신에게 매어 있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유익만 생각하는 것과 결국 자기의 유익으로 돌아가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이 현실이었지만, 우리는 내 자신을 현실로 여기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아닌 내가 현실이 되면 나의 입장과 형편이 중심이 되어 복음은 단지 명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복음이 명분이 되면 신자가 복음에 매여 복음에 의해 존재한다는 생각보다 복음을 아는 신자가 복음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정당함과 열심이 돋보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고전 9: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매여 복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을 화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지 않는 것을 화가 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에게는 복음이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복음이 아닌 자신의 문제가 현실인 삶을 산다면 바울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바울의 자유는 교회에도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베소든 고린도 교회든 머물지 못할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한없이 나의 입장에서 나 중심으로 살기를 힘쓰는 우리의 잘못됨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에 대해 판단해야 할 명확한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일평생 동안 복음을 들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자일뿐인데 복음을 말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값없이 은혜 받은 자로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나에게 유리한 내 입장이 없습니다. 주께 매인 자로 복음을 위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있으나 이미 미혹된 사단의 속임이 만연하여 보지 못한 어둠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하시고 이제서야 하나님이 보여주신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복음안에서 자유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만나게 하신이도 하나님이시며 듣게하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찬양드리며 목사님말씀을 통하여 내 속의 내가 없는 나를
보게하신이도 하나님임을 감사드립니다
주안에서 나는 나를 모르고 살았으나 나를 지으신 주님만이
나를 아시니 그분께 의지합니다
포항에서 은석교회 출석하고 싶은 마음을 소망하는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