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1.12.11 13:18

(11강) 고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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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9-25http://onlycross.net/videos/jer/jer-03192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설교>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책망과 함께 돌아오라는 권고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이나 돌아오라는 말이 뭔가 애매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성전에 계시는 분으로 이해한다면 성전 신앙을 버리는 것을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간주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가 성전이라고 일컫는 예배당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특정 장소에 계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이나 돌아오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것을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을 떠난 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필요성도 없게 되는 것이며, 돌아오라는 선지자의 말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본성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매이지 않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길로만 가려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기에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 곧 나를 향한 말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름다운 기업인 약속의 땅을 주시며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하고 그 아버지를 떠나지 말라고 하셨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기업을 주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될까요?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기 전까지 그들은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광야 생활의 전에는 애굽의 노예로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셔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서 농사하면서 곡식을 거두고 먹고 삽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먹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함께 한 결과인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실존에 대해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기 실존을 잊지 않는다면 삶의 모든 의미를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독립적인 관계에서 상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실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삶에 도움을 주는 신으로만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의 아버지라는 것은 마치 아이가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는 백성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자신에게 힘이 된다고 여기는 다른 것을 의존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힘 되는 것을 의존하는 자로써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절에도 보면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을 의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을 남편을 떠나 살 수 없고 남편의 사랑과 지켜줌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떠난 것처럼 하나님을 속이고 떠났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떠났다면 그것은 남편이 아닌 다른 의존의 대상을 향해 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마음에는 남편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남편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처럼 행동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속였다는 것은 마음에는 이미 다른 의존의 대상을 두고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을 한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다른 힘 되는 것을 의존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겉으로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존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남편을 속이고 떠난 아내처럼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희망은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22절에 보면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배역한 자식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시고 배역함을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배역한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우리의 배역함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배역한 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방신을 부르는 것이 헛된 일이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고 세상은 어떤 것도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만 바라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셨다는 증거입니다.

 

 

헛된 것을 의지하고 좇았던 죄를 깨달으며 남은 삶은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대셨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22-2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때문에 고침 받은 신자는 세상의 헛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헛된 것을 추구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붙드셔서 믿음의 길로만 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배역하는 길로만 갈려고 합니다. 나를 향한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고치십니다. 헛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고 거기에 마음을 두게 도우십니다. 잊었던 은혜를 우리의 심령에 회복시키시고 은혜로 감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치심, 즉 치료이며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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