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2.06.03 13:37

(32강) 기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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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1:14-23http://onlycross.net/videos/jer/jer-1114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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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설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유다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과도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와야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선지자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의지하는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우상을 섬기면서 우상에게 기도를 하고 자신들의 장래를 부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매일 같이 선지자가 기도해야 양식이 주어지고, 먹고 살 수 있다면 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뿐이고, 때문에 선지자의 기도에도 마음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롬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는데 만약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만약 평소에 성령이 나를 위해 간구하심으로써 믿음의 길을 가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러 있음을 믿는 신자라면 성령이 간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큰 충격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간구는 생각하지 않고 나의 기도와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음 생활 또한 나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성령이 간구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더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두려움이나 심각함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마치 바람에 실려 지나가는 구름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귀를 스쳐 지나가 버리는 말로 들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세상 것만 넉넉히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생각에 젖어 있으니 성령이 나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든 말든,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달라진 것이 없고, 특별히 주어지는 것도 없으며 누리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합니다.

 

 

 신의 기능과 역할이 신의 이름을 부르고 열심히 섬기는 자를 위해 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악이었기 때문에 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유다가 구원될 수 없는 악에 빠져 있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다는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의 노를 일으켰습니다. 진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그 같은 자신들의 실상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신앙의 길보다는 자기 소원을 이루며 세상의 것으로 넉넉해지는 삶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실상이 이러한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우상을 섬기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그같이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한 실상을 파헤치며 드러내는 말씀에는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 인간의 소원을 이뤄주고 복을 주는 거짓된 신에 대한 얘기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우상을 섬긴 유다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과는 무관하게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상을 부처와 같은 어떤 형상에게 절하며 소원을 비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자기를 위해 신을 부르고 섬기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부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상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자기의 뜻과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뜻과 계획에 의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찾으니 그것을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른다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이 이뤄지는 일에 순종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까? 사실 이러한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길에 붙들려 나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물으려면 ‘여러분을 예수 믿게 하신 그 분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믿음의 이유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음의 길로 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탄식의 기도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힘입니다. 즉 신자는 자신의 기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도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유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 같은 신앙은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도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애당초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다만 자기를 위해서 도와줄 신을 하나 선택해서 섬기는 척하면서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는 발상인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뜻이 나의 소원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 같은 길을 갈 수 없기에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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