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21-22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2122.mp4
<본문>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설교>
인간의‘자기 의’는 자신의 힘으로 선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의를 품고 있는 인간이라면 믿음도 자신이 실천하는 선한 행위로 작용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야고보의“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라는 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귀신들에게도 있는 수준의 믿음일 뿐입니다.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으며‘주여, 믿습니다’를 반복하여 외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귀신에게도 있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가능한 행함을 기준으로 믿음을 판단한다면 인간의 의를 믿음으로 간주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질 뿐입니다.
약 2:21-22절에 보면“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근거로 교회는‘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면‘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말보다‘믿음이 있는 행함’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면 아브라함의 행함은 믿음이 있는, 믿음에 의한 행함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라합의 행함에도 같이 적용됩니다. 행함의 주관자가 인간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함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행함은 인간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증거 하게 되는 원칙입니다.
믿음 있는 행함이 반드시 하나님을 증거 하게 된다면 인간이 행함으로 자기를 증거하고 자기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모두 믿음이 없는 거짓 행함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자신의 모든 행함을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실천이 아닌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을 이런 관계로 이해를 하게 되면 행함에 대해 오해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면 율법이 약속과 반대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하고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언약을 율법이 폐기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마치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가 되고 약속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 율법이 만일 우리를 능히 살게 하는 것이면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도 율법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인간을 살리는 기능으로 받아들인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22절의‘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죄에 갇힌 죄의 종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앎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할 수 없는 불의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으로 오신 분이 이루시는 의를 소망하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자들이 율법으로 자기 의를 이루고 자기 의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을 신자다움으로 왜곡해 버리는 것입니다.
22절의“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는 것은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의를 생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으로는 오로지 죄에 갇힌 자신의 실상을 선명하게 확인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죄 아래에 가두었는데 성경을 실천하여 믿음 좋은 의로운 신자가 되겠다는 발상을 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복음에 일치된 생각일까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성경과 믿음에 반대편에 있고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으면서도 믿음 가운데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한 자기의식을 갖게 되므로 인한 결과입니다. 선악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면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으로 해석하면서 말씀을 실천하여 순종하는 것을 선한 신자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에 대한 집착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 졌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입니다. 범법하는데도 자신이 범법하는 자라는 실상에 둔하고 알지 못한 자들을 죄 아래 가두어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더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보다 더 선하고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주어진 율법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범죄로 인해 진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시고 구원하신 중보자를 믿고 의지하게 하는 기능으로 더해졌다는 것이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시고 그 결과를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 베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은혜가 좋아서 은혜를 증거 하게 됩니다. 자기의 선함이나 믿음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로 은혜만 높이는 새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통해서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확실히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영광과 부요라는 복으로 채워진 삶이 자신의 역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이 자신이 원하는 역사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순종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신자가 되고자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의 헛되고 허망한 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 29:13절을 보면“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준을 율법에 두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켰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아 행하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으면서 입술로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 진멸 당할 대상임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을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활용해 버립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이고 지키지 않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자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간주합니다.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순전히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자기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는 헛된 신앙이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의가 살아있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지키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은 율법이 가르치는 중보자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나에게 마음을 두고 행함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것으로 간주 되는 것입니다.
요 5:22-23절을 보면“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이유가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아들을 공경하는 여부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위해 하신 아들의 일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일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자부했던 우리의 모든 행함이 아들의 행함 앞에서 버려지고 부인되는 것이 아들이 공경하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인간의 일, 행함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증거가 되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호소한다 해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들의 심판대입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아들을 공경하지 않은 실상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죄 아래에 갇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려고 동원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희생이 우리가 거룩한 성도로 여김 받은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능력과 수고와 열심을 부인하게 하면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기뻐하게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신분입니다. 이러한 성도 됨을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십자가의 희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며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성도 될 수 없는 인간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죄 아래 갇힌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행할 수 없고 다만 죄만 행할 뿐이라는 것에 우리는 그 어떤 반문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죄의 종인 것은 맞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의의 종이 되었기에 의를 행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신자가 구원받은 후에 의를 행할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현실의 삶으로 증명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는 삶의 현실을 보이지 못합니다. 율법이 드러내는 죄는 여전히 우리에게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성경으로 확인하고 자각하기에 매 순간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내시는 피의 능력으로 살아감을 고백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성도 된 자에게 맡겨진 역할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의한 순종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뜻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죄에 갇힌 자임을 깨닫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순종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순종을 고집하고 율법 지키는 것을 순종하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순종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순종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겠다는 발상이며 예수님의 공로가 아닌 나의 공로를 높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공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