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23-25http://onlycross.net/videos/gal/gal-032325.mp4
<본문>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설교>
성경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지식으로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해석한다 해도 모두 인간의 뜻에 맞춰진 왜곡된 내용일 뿐입니다. 왜냐하면“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모든 지식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선악 개념에 따른 사고방식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저주를 자초하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을 따라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계 22:18-19절을 보면“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 외에 더하고 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번역된 성경을 그대로 이용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성경에 다른 내용을 추가하거나 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22장과 같은 말씀도‘나는 말씀을 제하거나 더하는 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존재임을 추궁하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 내 마음으로 다른 내용을 추가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심각한 죄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예언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뜻을 따라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성경을 말한 사람의 뜻을 따라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선악 개념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언의 말씀에 더하고 제하여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악 개념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모든 내용이 선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의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선과 우리의 선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 인간의 뜻을 성취해주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해석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제하는 우리의 악함입니다.
믿음에 율법을 더하는 갈라디아 교회 역시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고 제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믿음을 증명하거나 확인시키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졌다고 하면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죄 아래 갇힌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에 죄를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더하였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3-25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 빗대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갇혀 있지만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쉽게 다가옵니까?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율법은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갈라디아 교회처럼 율법에 마음이 끌리고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에 미련을 두면서 참된 믿음의 증거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쉽게‘나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율법의 문제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자기 믿음을 염려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 목사가 쓴 기독교인 윤리에 대한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율법도 '사랑'이고 성령도 '사랑'이다 왜 그런가 모두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이 꼭 천대를 받아야만 하는가? 결국 바울에 의하면 윤리가 어디서 오는가? 율법을 순종함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 율법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취하러 오셨고,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율법을 성취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왜 그런가? 우리는 성령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율법을 성취하니 성령을 좇아 사는 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성령은 율법의 핵심, 정수를 성취하게 만든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이 글은 다른 목사가‘윤리는 그저 교양에 불과하다’고 쓴 글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 중의 극히 일부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쓴 글의 오류가 무엇일까요? 이 사람은 마치 자신이 율법도 알고 성령도 알고 복음도 아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선악 개념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윤리는 선한 것인데 그것을 교양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 것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윤리는 중요한 믿음의 덕목으로 여기면서 율법을 성취함으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를 윤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면 그 영에 의해서 우리도 율법을 성취하게 되고 그것이 윤리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면 성령을 받은 자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필요 없이 성령이 와서 율법을 성취하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살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람의 글에 보면 윤리를 설교하는 목사들도 모두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라는 말을 근거로 바울도 윤리 설교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구절 외에도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수많은 내용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결과입니다.
심지어 이 사람은‘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윤리의 범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령이 우리를 윤리적인 사람이 되게 하신다면 세상의 누구라도 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면 성령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결국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윤리적인 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저주를 받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이 솔깃하게 들리는 것은 실천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신자, 말씀의 실천과 무관한 믿음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선악 개념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십자가만을 말하는 복음은 편향되었다고 하면서 지금의 기독교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의 폐단도 십자가만 말하고 윤리적인 실천이 없어서 발생한 결과라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입으로만 십자가를 말했을 뿐 십자가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립니다.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더는 율법의 안내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실천하고 율법을 성취해야 하는 것에서 자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믿음과 율법은 동반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을 실천하고 성취해야 하는 요구 아래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믿음과 율법, 즉 행함을 함께 가는 동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제하고 더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라는 것은 교사의 실력과 자질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초등교사에게 배우는 학생이 어리고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이 죄를 알지 못해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여서 율법을 초등교사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선을 행할 수 없고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백성이 되겠다는 무지함과 어리석음과 무능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게 되면 율법을 행하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시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의로움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은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안내하여 십자가의 의를 의지하게 하고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행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납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으로 성취된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증언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약 1:25절에 보면“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율법의 온전함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 율법의 온전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잊어버리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행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악 개념은‘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내용보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통로가 진리와 율법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에 그리스도께 소속되어 나의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이기에‘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야고보의 말은‘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라는 바울의 말과 일치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음에 대해‘복음만 말하면서 비윤리적으로 사는 교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라는 반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나름대로 우리가 염려해야 할 그럴듯한 반발이지 않습니까? 이런 점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복음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알고 만난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만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여겨야 합니다. 윤리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음에 붙들고 놀고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지 않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이 돕지 않으면 나의 길에 뜻을 두고 달려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고백하는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고전 15:9-10절의“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처럼 말입니다.
윤리를 말하려면 이런 윤리를 말해야 합니다. 세상의 도덕성과 함께 하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말해야 하고 인간의 성품과 의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세상에 없는 윤리를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행함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진정한 기독교 윤리입니다.
초등교사인 율법은 나의 행함을 생각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예수님의 행함이 있는 십자가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함만이 의가 됨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초등교사로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소위 초등학생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초등교사인 율법의 안내를 잘 받아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