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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 4:1-7

갈 4:1-7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010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설교>

갈라디아 교회가 유대 기독교인의 요구를 따라 율법과 할례를 받아들였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복음이 아닌 것으로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율법과 할례를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 지금의 교회가 행함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목사라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행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반드시 그 행위도 온전해진다는 주장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받아들인 것은 믿음만으로는 믿음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증거가 없이는 믿음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위를 배제한 채 믿음만 강조하게 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행위의 방종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음을 염려한다면 믿음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율법은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행함을 놓을 수 없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신앙인의 모임이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의 행위로 교회가 세상과 다름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에게 믿음과 결부된 것으로 여기는 행위가 따르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거기에 윤리적 행위도 포함하여 믿음의 차별화를 가르칩니다. 이것이 행위를 배제한 믿음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지금의 교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받아들인 것은 율법을 행하는 믿음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맞지만 신자가 의롭게 되었다면 그 의로움으로 나타나는 증표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교회를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신앙의 기준으로 세워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주일성수와 십일조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계명으로 존재하고 교인들에게는 철저한 준수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준수하지 않고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와 같은 직분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았다면 직분을 맡은 후에는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많은 목사의 설교가 이러한 행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만 증거되는 복음보다 교회에 더 중요성을 둔 결과이며 기독교의 심각한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일성수, 십일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무관합니다.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교회가 교회 유지와 성장을 위한 목적으로 제멋대로 믿음의 기준과 잣대로 정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을 인용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지만 말씀의 뜻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교인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불안감의 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가 없는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며 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초등학문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하였다는 것은 율법을 주인으로 섬겼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인이 자유를 주지 않는 한 종은 주인에게 구속되어 주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행동해야 하는 신분으로 있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한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렸을 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3:29절에서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자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동안에는 초등학문 아래 있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는 어렸을 동안에 종 노릇했던 경험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어릴 때 종 노릇한 경험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나는 어렸을 때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한 경험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합니다. 어릴 때의 경험이 없고, 그러한 경험을 알지 못한 채 유업을 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만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시고 43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생활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면서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약속한 땅이 아닌 애굽으로 이끄신 것은 인간의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지낸 430년은 이스라엘에게는 고통의 기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종이라는 기간이 없이 약속의 땅으로 직행하였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든 모르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시고 유업을 잇게 하시는 은혜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른 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누리는 것만 즐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애굽의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지를 알고 자신을 백성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참된 백성을 남기기 위해 애굽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지내면서 애굽에서 해방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여 내지 않으시면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전문에 그러한 내용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십계명을 지켜서 백성답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잊지 말라는 취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3:17)라고 말하며 율법을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저주와 심판의 나라입니다. 그러한 나라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것은 이스라엘 또한 저주와 심판의 대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당연한 신분이기에 누구도 자신의 의와 행위를 동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이것은 유업을 이을 자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4절을 보면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유업을 이을 자로 부르셨기에 종 노릇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아들 되게 하신 것이고 그 일을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된 신자에게 반드시 있는 경험은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하던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신자라면 어려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율법에서 속량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게 하신 내막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아들이라 하시고 아들의 영을 마음 가운데 보내어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6절의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유업을 이을 자를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게 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으로 종결됩니다.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에 더 이상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신자는 자신을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게 되는 믿음의 시각을 새롭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과연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증거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행함을 믿음의 열매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함에 미련을 두는 것은 교회를 향한 탐욕입니다. 믿음을 자기의 행함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인간의 속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율법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은 하나님에 의해 얻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행함이나 자질과는 무관한 명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들 되게 할 자 자로 부르신 자에게 주신 명분이지만 그들도 본래는 저주 아래 있는 신분입니다. 이러한 아들 됨을 행위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의 시선을 하나님의 일하심에 두지 않는 불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하여 말씀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아들이라는 증거물이 되지 못합니다. 아들 됨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성령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에 모든 가치를 두고 높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을 믿음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6절에 보면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지켜주고 보호하신다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지켜주는 하나님을 원하면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사탄의 유혹을 따라 우상을 섬기는 죄의 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완성하신 하늘의 의에 참여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그런데 행함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공평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와 십일조 등을 믿음의 기준으로 세우고 교인들에게 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과 은혜와 십자가의 완성, 그 모든 것을 훼손하고 훼방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한 일을 교회가 행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었을 때와 율법 아래에서 종 노릇하고 있을 때를 비교한다면 언제가 더 성실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까요? 율법 아래에서 종 노릇하고 있을 때입니다. 율법이 지시한 대로 실천하고 행하는 종의 생활이 아들로 살아가는 그것보다 당연히 더 성실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종과 아들을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실한 삶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을 가치가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 되게 하신 사랑과 자비 아래 있게 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자녀 되므로 감사하는 믿음을 행함을 기준으로 게으르다거나 방종하다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은 우리는 분명 종이 아니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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