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5-11)
<설교>
신앙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는 그 곳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르고 찾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다만 종교일 뿐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초월적인 존재가 신이고, 그 신을 믿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현대 기독교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지향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가 신앙을 바르게 분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지난 주일에 위의 것과 아래 것에 대한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계속 믿음에 대한 말을 하던 사도가 본문에서는 갑자기 도덕과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한 이것들은 세상이 볼 때는 도덕이고 윤리입니다. 즉 바른 생활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르게 사는 것을 믿음의 실천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해서도 신자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8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신자는 분을 내지 말아야 하고 악의와 비방의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것이 믿음생활일까요? 도덕적인 삶, 바른 생활, 이런 것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되고 바른 믿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이나, 법정 승려의 삶에 대해 세상이 그토록 들썩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기독교가 비방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지향하는 현대 기독교의 모습은 신앙에서 멀어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바른 삶이 참된 믿음의 증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는 도덕적인 삶의 실천을 요구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삶은 얼마든지 꾸며낼 수가 있습니다. 거짓선지자의 특징이 바로 도덕적인 삶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선으로 여기는 세상을 향해서, 도덕과 윤리로 자신을 위장하여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예수가 참되다는 착각에 빠뜨리고 속이는 것입니다. 즉 도덕과 윤리에 속는 것입니다.
사도가 음란과 부정과 사역과 탐심 등을 땅에 있는 지체로 표현을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지체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지체가 없다면 그러한 것들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그들은 지체를 가진 몸이었으나 음란과 부정 탐심 등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지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사단으로 인해서 자기 지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 때 지체로 인한 쾌락과 지체를 위한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음란과 부정 탐심 등을 죽이기 위해서는 자기 지체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떤 사람은 지체를 죽이라는 말을 절제하고 제어하고 극복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기독교인보다는 불교인이 더 잘합니다. 그들은 고행과 절제를 통해서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인간의 모든 부패성을 억누르는 일에는 숙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함과 악의와 비방 또한 우리 스스로 벗어 버릴 수 있는 문제일까요? 조금의 절제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일어난 것 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일어나 있는 분노와 악의와 비방을 입으로 토해내는 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말은 바른 생활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은 지금까지 사도가 말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사도는 지금 믿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위의 것 땅의 것에 대한 내용도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믿음과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믿음은 인간을 지향하고 인간의 유익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처럼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믿음을 들고 와서, 항상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인간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더럽다는 사실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인간에게서 깨끗하고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도덕과 윤리는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살고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도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의 속에 가득한 것은 음란이고 정욕이고, 부정이고 탐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죽이지 못한 채 항상 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뿐입니다. 무소유를 말한 법정도 결국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그러한 말이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답입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들의 수준이고 시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하고 더러운 자들이 욕망으로 가득한 채 춤추고 있는 향연으로밖에 보시지 않습니다.
바울이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는 강한 실체를 실감하게 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탐심과 정욕, 이 모든 것은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는 강한 세력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향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것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세력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나를 해롭게 하는 자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악의와 비방 또한 자연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할 때 신앙생활을 하신다고 여기십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바울의 말 앞에서도 그같은 생각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바울의 말 앞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6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내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만들어 낸 믿음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다만 욕망의 의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인간이 본질이 어떠한가를 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니었다면 저주에 갇혀서 영원한 멸망으로 끝나야 할 존재일 뿐임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만을 의로운 것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힘도 재주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을 진노를 예수님이 담당하신 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 것을 내어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체를 죽인 자로 사는 것입니다.
즉 음란과 부정과 탐심 등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알고, 그러한 인간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할례를 했다고 해서 안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의 세계이며 이것이 복음이고 진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행한 것을 의로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인간만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믿는 믿음의 세계에서 과연 인간의 행함이 높임을 받고, 그 행함을 근거로 해서 복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저주에서 건짐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신자 됨의 중심에 누가 계시는가를 생각하시고, 그 분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