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2-17)
<설교>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구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참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구원에 마음을 둔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문제도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은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남겨 놓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진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써 그 심령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는 믿음의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신자는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없이 세상의 것으로 충만해지려고 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만을 행복으로 누리고자 하는 것이 헛되고 어리석은 것임을 나타내어야 할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믿음은 자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인간을 지향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옛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에게서는 새사람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새 사람 되었다는 것은 예전의 못된 행실을 고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못된 행실을 하던 사람이 옛 사람이고, 못된 행실을 고치는 것이 새 사람 된 것이라면 처음부터 못된 행실을 하지 않던 사람은 옛 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사도가 말한 옛 사람의 행위는 5절에서 언급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 된 신자라고 해도 이러한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한 옛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을 옛 사람의 모습을 모두 죽여 버린 상태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한 새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6절을 보면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5절에서 언급한 옛 사람의 모습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입니다. 이것을 땅에 있는 지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그 모든 것이 나오고 있고 따라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악하고 더러운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더러운 존재에게 주어질 것은 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 밖에 없는데 인간에게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인간의 악한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것들을 막을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도가 말한 옛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이 있고 믿음의 실천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옛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음란과 정욕과 탐심이 있는 인간의 내면은 아예 덮어 버린 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행실로써 인간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착한 행실이 있으면 그는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인정을 합니다. 즉 행실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간의 행실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행실의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진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는 생각하지 않은 채 착한 행실이 곧 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9절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은 보지 않고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이 될 것이라는 말이 진리가 아니기에 거짓말이고, 그것이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옛 사람의 행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행위를 벗는 것은 인간에게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땅의 지체, 곧 음란과 악한 정욕과 부정과 탐심을 보면서 인간이야 말로 심판 받을 존재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인간의 착한 행실을 앞세우거나 자랑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실천해도 자신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한 자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옛 사람을 벗고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으로 사는 새사람입니다. 12절의 내용은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거로 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12,13절)라는 내용은 신자에게 실천하라는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본질적으로는 진노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진노의 자식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겸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온유와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서 진노에서 벗어나 생명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 되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것이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사람에게서 13,14절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용납, 용서, 사랑, 이것 역시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신 것을 옷 입고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예수님이 베푸신 용납과 용서와 사랑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노의 자식인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것은 우리의 악함을 보지 않으신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긍휼을 옷 입고 사는 새 사람 된 신자는 다른 사람의 악함에 대해 비방하고 수군대고 판단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나고 그래서 비방과 판단이 아니라 용납과 용서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음란과 정욕과 탐심 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터져 나오는 그 같은 실상을 보면서 진노 아래 있어야 하는 자기 본질을 알고, 그런 자신에게서 선과 의가 나올 수 없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가 구원이 되고 생명이 되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문제는 우리의 실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능력이 되어서 신자로 하여금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하고 충만한 것을 보게 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 된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있음으로 감사하며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평강 또한 새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새 사람 된 신자는 한 몸의 관계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구별이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파와 무할례파, 종과 주인 관계없이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한 몸의 관계로 모인 교회의 평강입니다. 출신, 환경, 행실, 성격, 등에는 차별이 있고 다 다르지만 그것이 차별과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우리의 의가 되고 생명이 되신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평강입니다. 즉 차별, 판단, 경쟁 등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신자는 자기 이름을 위해 행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 행한다면 모든 것은 자신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주의 이름으로 하고, 주가 하셨음을 믿는다면 다만 ‘주의 은혜입니다’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새사람을 입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