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27-28http://onlycross.net/videos/gal/gal-042728.mp4
<본문>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설교>
바울에게는 지키고자 하는 복음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자유’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복음이 주는 은총이기에 바울은 교회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 자유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단순히‘행함이냐 믿음이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함과 믿음 둘 중에 믿음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피로 인해 가지게 된 자유를 빼앗기고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행함이냐 믿음이냐’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계속된 문제입니다. 양쪽 모두 성경 구절을 근거로 자기주장을 펼치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은 행함이 아닌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함이 아닌 믿음을 주장한다고 해서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믿음을 자신이 만들어내는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순히‘행함이냐 믿음이냐’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을 받아들인 것은 율법의 행함으로 증거되는 믿음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요구되지 않는 믿음은 분명 우리를 의문과 혼란으로 끌어갑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행함은 믿음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판단할 수 있는 보이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불합리한 것보다 합리적인 것에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를 통해서 언제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가는 우리의 성향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스마엘을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하는 이유도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가는 인간에 의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종인 하갈이 아브라함과 동침하여 이스라엘을 낳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여자를 통해서라도 후손을 얻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시 아브라함 곁에 있었다면‘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니까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고 말했을까요? 사라가 젊어서 잉태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잉태 가능성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도 이미 늙어서 잉태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거부하지 못하는 인간의 성향입니다.
27,28절에서 바울은“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고 말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가문이 번성하는 것을 복으로 인정하는 고대 사회에서 여인이 출산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도무지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이라면 믿음은 맹목적이고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는 것은 선지자와 같은 생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선지자와 바울은 어떤 생각으로 통일되어 있을까요? 자식 낳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그러한 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는 말에 공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선지자는 잉태하지 못한 현실이 아닌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다른 현실을 생각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 53장을 보면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는 내용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이사야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면 십자가는 우리를 허물 있는 자, 죄악 가운데 있는 자로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마땅히 형벌 받을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합니다.
갈 2:20절을 보면“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죽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길을 갑니다. 이것을 세상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그릇 행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처럼 그릇 행하여 자기 길을 가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높임 받고 자기를 증거 하는 길을 가는 자는 죽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증거 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은 자신을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행위를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이 살게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믿는 자로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까지도 못 박혔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으로 주어진 새로운 믿음 안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믿음이 죽고 새로운 믿음에 의해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도 행위도 믿지 않게 된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믿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은혜의 행위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로 믿음을 보여주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기존의 믿음으로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선지자와 바울이 말하는 잉태하지 못한 자는 우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죽은 우리가 육체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끊임없이 죄만 생산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잉태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로 천국 백성 될 수 없는 우리를 백성 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이 언약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잉태하지 못한 자에게 관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그 사랑으로 즐거워하고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실로 인정하는 것은 홀로 사는 자에게는 자녀가 없고 남편 있는 자에게 자녀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여자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남자 없이 자녀를 잉태하여 낳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관으로 믿음의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이 전혀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받고 의로운 자로 인정받으며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잘못된 인간의 현실관이며 이러한 현실관을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포함된 믿음에 마음에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홀로 사는 자에게 자녀가 있는 것은 여자의 능력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일하고 계시는 현실이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한 성도라는 새로운 피조물은 이러한 현실관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도가 그러합니다. 세상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방식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 열심, 노력이 모두 배제되고 순전히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부각 되는 것이 하나님의 관여하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현실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면서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죽은 자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신자 된 것을 있을 수 없는 은총의 사건으로 대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십자가 은총으로 감사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회개의 도구로 주신 것이지 행함을 통하여 신자 됨을 나타내거나 믿음을 증명하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에게 자식이 있고 홀로 사는 자가 남편 있는 자보다 자식이 더 많게 되는 것은 세상이 아닌 위로부터 주어지는 방식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성도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는 언약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 잉태하고 하늘이 낳은 존재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이고 위대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룬 은총에 의해 새롭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예수님이 낳은 자식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홀로 사는 자가 하나님으로 인해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성도는 무엇을 행하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자랑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에 방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 1:12-13절에 보면“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에 홀로 사는 자의 자녀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실천하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선한 노력과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자녀다움을 보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칭 성도라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성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의 신분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다른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에도 이러한 속셈이 자리합니다. 나를 낳으신 아버지라는 인식은 없습니다.
6,7절을 보면“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아들이기에 유업을 받을 아들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려고 아들의 영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 십자가의 피가 개입되어 있기에 아들의 피로 감사하며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참된 자녀이지 선한 행위가 있어야 자녀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28절에서“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는 약속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유자입니다. 신자 되고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졌음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자녀의 신분이 예수의 피가 능력이 되고 은총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약속의 자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