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4:7-18)
<설교>
서신서는 항상 문안 인사로 끝을 맺습니다.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안인사의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주석을 봐도 인사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거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사말이라고 해서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두기고를 보내서 자기 사정을 알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두기고를 보내서 우리 사정을 알리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한다는 이 말은 에베소서 6:;21-22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빌레몬서 빌립보서와 함께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옥중 서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기록한 서신이어서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도는 두기고를 보내서 자기 사정을 알리고 그것으로 교회를 위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도가 언급한 사정이라는 것은 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도가 알리고자 하는 사정이 옥에서 고생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도의 사정을 교회가 안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힌 바울의 사정은 낙심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 두기고를 보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해 얘기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다스리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주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교회됨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말입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에도 골로새 교회와 같이 두기고를 보내서 옥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자기 사정을 알리는 이유는 옥에서도 주가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더욱 힘써 주를 바라보고 힘을 얻어서 영적 싸움을 하는 교회로 굳게 서갈 것을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골로새 교회에 두기를 보내는 이유는 에베소 교회와는 조금 다릅니다. 골로새 교회는 거짓선생들이 들어와서 바울과는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신자의 실천과 행함, 경건과 겸손 등 외적인 것을 통해서 신자다움을 증거해야 하고 그것이 곧 믿음의 풍성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골로새 교회에 사도는 두기고를 보내 옥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기 사정을 알림으로써 신자는 어디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신자다움이 증거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옥에 갇힌 바울에게 무슨 실천이 있겠습니까? 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가 바울에게 함께 결과였고 그것으로 신자다움은 충분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건강을 잃고 병상이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께 감사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기뻐한다면 그것이 곧 성령으로 인한 신자의 실천이고 행함이며 그것으로 신자다움은 얼마든지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실천과 행함이 있어야 신자다움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음에 9절을 보면 오네시모가 나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인데 도망을 쳤다가 로마에서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에게서 도망을 친 노예가 로마에까지 가게 되고, 또 로마에서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고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오네시모를 두기고와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 앞에서 감히 인간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의 전도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것이 오네시모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다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있음을 오네시모를 증거물 삼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음에 10-11절을 보면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예수라는 인물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할례파는 바울의 복음을 핍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울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할례파인 그들이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들이 변해서 바울 편에 섰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파인 그들이 바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역사한 것도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주변에서 되어진 모든 일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보았고, 그래서 옥에 갇혀서도 얼마든지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옥에 갇혀도 주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것이 곧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옥에서 죽든 살든 모든 것은 주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할례파인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는 바울에게 그런 위로가 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할례파 무할례파가 무슨 소용입니까? 절기를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이 지체가 서로 나뉘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까? 교회는 주가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모여서 주를 바라보고 낙심할 일에 서로 위로하며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뭔가를 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누고 차별할 수 없습니다. 주를 믿는 믿음으로 모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할례파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어떤 사람은 무할례파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뿐입니다. 때문에 할례파가 옳은 것이 아니고 무할례파가 옳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심을 믿는 것만이 옳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주를 보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중심이 되어 분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12-13절에는 에바브라가 등장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에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골로새 교회를 떠나 있지만 에바브라는 항상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습니다. 따라서 에바브라의 기도는 골로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확신이 있는 신자로 굳게 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완전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완전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바브라가 처음부터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에바브라가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골로새 교회가 완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로 굳게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짓 선생들의 복음과 차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차별로 인해 나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4-16절에는 의사 누가, 데마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문안한다는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각기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생활도 다르지만 서로 문안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형편, 세상에서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같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서로 문안할 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사라지고 인간이 개입되면 결국 인간의 행함과 실천이 자랑과 의로 등장하게 되고, 겉으로는 형제라고 하지만 ‘나는 너와 다르다’는 우월감에서 문안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7절에는 아킵보라는 사람에게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킵보라는 사람이 거짓 선생들로 인해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권면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신자는 모두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이 있고, 그 직분은 복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직분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이 문안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합니다. 의사도 있고, 노예도 있고, 마가처럼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사람도 있고,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거짓 선생들의 눈에 신자로 여길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모두를 언급하며 문안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주께서 택한 자라면 주가 그를 돌이키게 하시고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다움은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드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를 바라보고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낙심하고 무너질 형편과 내 뜻대로 안되는 실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생활을 하느냐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주께 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실천과 의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거룩함을 입고 완전케 되는 은혜에 있게 됩니다. 교회는 그 은혜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는 인간의 행함과 실천이 중심이 된 구별과 차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우리를 완전케 하신 주의 은혜에 마음을 두면 됩니다. 그 마음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고, 그 마음으로 교회는 주를 향한 동일한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고 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와 문안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