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설교>
데살로니가는 헬라인과 로마인, 유대인들이 함께 섞여 살던 지역입니다. 이 데살로니가로 사도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행 17: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쳤는데 회당에 있던 적지 않은 경건한 헬라인인과 많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경건한 헬라인이고 귀부인이라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고 힘 있는 집안의 부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대교를 등지고 이제는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면 유대인들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헬라지역인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헬라인들이, 그것도 헬라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유대교에 함께 하고 따른다면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크게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헬라인들의 많은 수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겠다며 개종을 한다면 유대인들로서는 시기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당연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람을 동원해서 바울을 잡으려고 하고, 바울은 결국 데살로니가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남겨 둔 채 실라와 함께 베뢰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도 유대교를 따르던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결국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도망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 일행은 다시 아덴을 거쳐 고린도로 가게 되고, 고린도에 찾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들은 교회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겨우 3주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신앙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격려하고 동시에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재림과 종말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서신을 써서 보낸 것입니다.
편지를 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인사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도 사도의 서신서이기 때문에 편지의 형식을 따라 가장 먼저 인사말이 나옵니다.
1절에서 사도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말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인사말은 그냥 통속적인 인사로 보입니다. 우리도 별다른 의미 없이 이런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도 교회가 행사를 준비하고 다른 교회에 초청장을 보낼 때 거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통속적인, 말 그대로 인사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은 교회와 가정이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하게 잘 지내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의미로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은혜와 평강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즉 좋은 환경으로 인해서 근심 걱정이 없는 편안한 삶을 사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통상 믿음을 원하기 위한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을 하고, 그래서 ‘믿는 대로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신자의 믿음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근거로 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근거로 한다면 신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완벽히 이루신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문제는 단 한 점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행하고 실천하느냐는 것은 언급할 문제가 못됩니다. 우리의 행함이나 실천이 예수님이 다 이루신 생명의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을 해도 부족하고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자기 무능을 인정하는 자로 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신 주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꿈꾸고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싸움에 묻혀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내 교회 사람으로 확보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확보하려는 싸움,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으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많은 수의 교인이 목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자신의 능력과 명예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은혜와 평강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천명이 되면 만 명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끝없는 욕망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에게 은혜와 평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에 갇힌 인간에게 믿음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믿음을 헌금과, 봉사와, 실천과, 전도로 연결하여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교인들을 자기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다 이루심을 믿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하면서 받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옥에 갇힌 형편이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도는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했습니다. 바울의 성격이 낙천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 안에서 바울은 자신이 별도로 세우고 이루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설시 자신이 세운 계획이 있다고 해도, ‘내 계획을 다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주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옥에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아쉬울 것도 후회될 것도 없었기에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신자에게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평생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루어야 할 것은 이루지 못한다면 분명 사명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신자에게 무엇인가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목사에게 교회 몇 개를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선교사로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면, 한국의 모든 목사가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고, 이제는 신자를 다 이루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천과 행함의 여부를 바라보며 자책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책해야 하고, 자책하지 않고 만족해도 되는 행함의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상에 달라지기 때문에 행함과 실천으로 인한 불이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이루신 믿음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것도 이룰 것도 없기 때문에 실천과 행함의 문제로 인한 불이익은 없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며 복음을 전하고 봉사를 해도 주가 하신 일이고, 병상에 누워 있어도 주가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해도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주를 믿는다면 그는 주의 일을 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이런 믿음 안에서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안될까?’라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고,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의 경건과 거룩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서 경건하고 거룩한 자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경건과 거룩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고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신자는 자연히 자신의 삶과 행동이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그릇 다운 것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준 높은 행동과 삶의 실천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경건과 거룩을 증거하는 그릇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해야 할 것도 이루어야 할 것도 없다는 말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함에 붙들려 있는 사고방식에 의한 생각일 뿐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일관되게 흘러야 하는 것은 예수라는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된 우리의 생명의 모든 문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자는 부족함이 없다는 이 믿음이 신자에게 일관되게 흘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신자를 은혜와 평강에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