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6.28 22:22

(4강) 건지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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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1:9-10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109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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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9-10)

 

 

<설교>


기독교계의 여러 가지 소식을 다루는 ‘뉴스엔조이’라는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면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접할 수가 있고, 목사에 대한 소식 또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뉴스엔조이에서 들을 수 있는 교회 소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의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교회다움을 보여주는 소식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답지 못한 교회를 비난을 하고, 교회다움을 보여준 교회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느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교회에 관심을 둡니다. 어느 교회가 짧은 기간에 크게 부흥을 했다는 소식에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런 부흥을 이루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고, 새벽예배의 부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모 교회의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교회도 새벽예배를 부흥시켜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사업 등으로 사회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교회 역시 좋은 평을 듣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볼까? 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여 좋은 믿음의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됩시다’는 말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본받고 이용하여 내 교회의 이름을 높이는데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을 들은 각처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믿음의 소문을 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신자의 노력과 신앙심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으로 퍼진 믿음의 역사를 사도가 어떻게 데살로니가로 들어갔느냐와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는가로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떻게’라는 말은 ‘사도의 전도 열정과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도 그들의 믿음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역사하신 결과,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 결과라는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어떻게’라는 말입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는 신자들의 대단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문에서 신자의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자의 바른 시각인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이 새벽예배에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은혜의 결과라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부흥하지 못하고 새벽모임 등에 열악한 교회들은 은혜가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뜻합니다. 그것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신에게 힘 되는 것을 의지하는 인간 속성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의 수고도 동일합니다. 인간은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섬긴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분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수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환난과 핍박의 환경에서 하늘로 가신 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에서의 사람의 관심은 하루속히 그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오시겠다는 때와 시간도 말씀하지 않고 하늘로 가신 분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소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 또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의 믿음의 소문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죄에서 건지시고 의의 나라로 인도해 가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인간이 활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믿음의 소문에서 봐야 할 것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이어야 합니다.

 

 

10절의 마지막을 보면 사도는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들은 각처의 반응에서 역시 예수님의 일하심을 바라봅니다.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듣고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믿게 되었다면 그 역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지혜이기에 그 또한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장래의 노하심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증거합니다.

 

 

장래의 노하심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늘로 가셨고, 가신 뒤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셔서 여전히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들이 강림하기를 소망하며 인내하게 하신 그 모든 것이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기 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하심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욕망의 시각에서 자기 멋대로 판단합니다. 세상에서는 복을 받아 잘 살도록 인도하시고 죽은 후에 천국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생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생각일 뿐입니다. 믿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아들의 강림하심에 소망을 두고 인내로 기다린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사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세계,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만 있을 뿐이지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 현재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매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믿음에 붙드시기 위해서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세계만 있을 뿐입니다. 그 일하심은 사도가 증거한대로 우리를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매일같이 바뀌는 변덕스러운 우리를 다스리시면서 죄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한 예수님의 일하심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죄를 보면서 회개하게 되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복음으로 인해서 환난에서도 기쁨이 있게 될 때 그것으로 예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견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선물로 받았기에 또 다른 것을 보상으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신자는 받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받기 위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아직 받은 것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신자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의 백성인데,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받은 것이 없다면 예수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가짜입니다.

 

 

그래서 고후 6:10절 뒷부분에 보면 사도는 자신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모든 것에 해당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은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세상 모두를 가진 것입니다.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강림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건지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의 가치를 장래의 노하심, 즉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의 성취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마음에 모든 삶의 답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이 답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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