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8.09 10:41

(9강) 사도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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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3:1-8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3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설교>

사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형제는 단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사도에게 형제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다면 모든 서신서들은 형식적인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한 모든 신자들을 형제로 여겼고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사도에게 믿음의 형제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개인의 성품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의 사랑은 믿음이 좋은 사도 한 사람의 사랑으로 전시될 뿐이고 우리는 사도의 사랑에 감탄하면서 칭송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사랑을 본받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사랑은 우리가 본받아 행할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사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가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로 하여금 그 같은 사랑을 나타내도록 한 것입니다. 즉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이 사도에게서 신자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사도의 사랑은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도의 사랑을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2,3절)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막음으로 가지 못하고 대신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그 이유 역시 그들을 굳게 하고 믿음에 대해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던가하는 것은 8절의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로 인해 염려하던 중 디모데를 통해서 그들이 환난 중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이 사도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위로가 되었든지 ‘이제는 살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즉 ‘모든 시름을 덜어내어 이제 살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 교회를 향한 최대의 소원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우린 이러한 사도의 마음에서 신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관계가 아닌 다른 것이 있습니까? 목사는 교인을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를 출석하고 헌금을 해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교인은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하나 골라서 출석해주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안다고 하는 신자의 관계는 아닙니다. 단지 종교인들의 만남일 뿐입니다. 이러한 만남에서는 사도와 같은 마음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정한 날과 시간에 모여서 같은 장소에서 예배하고 헤어지는 것이 전부인 관계일 뿐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타인의 믿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환난에 처하든, 고통을 받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안됐다’는 말로 형식적인 위로를 할 뿐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는 인간의 약함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몸의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의 그 사랑과 마음을 본받자’라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요 4:7,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0,21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그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와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는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발생한 관계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인해서 한 몸의 관계가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 몸의 관계인 교회에서는 너와 나가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에서도 너와 나가 없습니다.

 

 

따라서 더 나은 믿음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타인의 믿음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믿음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을 행하고자 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이 너와 나의 개인적 관계에서 만나게 되면 ‘너 기도 했나’ ‘너 주일 지켰나’라는 것만 보게 됩니다. 목사도 교인들을 보면서 섬김을 받고 싶은 욕구만 드러내게 되고 교회를 위해 충성스런 일꾼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빠진 인간적 관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에 대한 욕구로만 살아갑니다. 사랑을 말하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진리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러분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한 몸의 관계에 있게 된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의 관계에 있는 다른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6,7절에서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에게 위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도의 형편 역시도 궁핍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형편에서 위로로 다가온 것은 함께 환난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통해 그 증거를 보게 된 것이고, 그것이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도 위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궁핍과 환난의 형편에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좋은 형편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원할 것이고, 그런데도 궁핍과 환난이 계속되면 원망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궁핍과 환난의 형편에 있는 신자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굳게 서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께 위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에서 살아 역사하시고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위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궁핍과 환난에 있다고 해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면 그리스도가 위로로 가득하게 됩니다. 신자는 그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의 믿음에서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경쟁이나 비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서로 간절히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이 서로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것도 인간적 정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환난 가운데서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망했고, 사도는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믿음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 마음이 일치가 되어 서로 간절히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너는 왜 저 사람보다 못하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너는 저 사람보다는 잘한다’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저주에 갇힌 자일뿐입니다. 그런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용납하시고 덮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백성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랑으로 모이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드러날 것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는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자리에 서서 어떻게 나 같은 자가 부활과 생명에 속하게 되었는가를 차근차근 찾아가 보십시오. 그리고 도무지 나 같은 자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나를 덮음으로써 용서 받음으로 살아있게 되었음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시고 그 사랑에서 형제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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