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설교>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느긋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았으니 오실 때는 아직 멀었다거나, 아니면 재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긴박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말씀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뤄 질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환난과 핍박에서도 주를 믿는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재림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이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함께 예수님을 기다렸던 가족과 신자들이 하나 둘 죽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어 버리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릴 신자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재림의 영광을 살아서 예수님을 맞이한 신자가 누리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재림 전에 죽은 자는 살아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과 기쁨은 누리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지 죽은 자들은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조바심과 염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해 재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교회가 자는 자에 관해서 꼭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자에 대해 알아야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날 때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깨어나게 되면 또 다시 살아가는 세계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에는 다시 깨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망 없는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가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신자는 죽음에 대해서도 세상과는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없는 세상은 죽음이 곧 끝이기 때문에 슬픔 밖에 없지만 신자에게는 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으며, 따라서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도 나름대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는 공통적으로 내세에 대해 언급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소망은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한다면 세상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사도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면서 자는 자에 대해 알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4,15절)는 말로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죽은 자에 대해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부활하게 하여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십니다. 때문에 비록 재림 전에 죽었다고 해도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에 있어서는 산 자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없고 염려할 수 없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달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 세상은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문명과 과학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 있는 신자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신자는 이미 산 자가 되었고 생명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없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세상에 기대를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여전히 세상에 기대를 두면서 재림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진심으로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도 소망 없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위의 내용은 장차 일어날 실제 상황입니까 아니면 단지 판타지 소설의 한 내용입니까? 물론 위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 주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이지만 분명한 것은, 재림은 분명히 있을 실제 상황이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도 주를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새로운 완성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왔고 좋아했고 소망을 두었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진 채 말입니다. 재림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세상에서 사는 것 까지 포기해 버리는 자가 있게 했지만 진심으로 주를 기다리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이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다시 낫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죽은 자가 다시 일으킴을 받는 부활이 기적입니까? 심지어 목숨이 끊어진 자가 다시 소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참된 기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가 되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참된 소망이고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를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절)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오히려 신자에게 죽음은 육신을 벗어버리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믿음이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소망을 기대하는 믿음이라면, 단언하건데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의 영광에 마음을 뺏기고 흔들리는 것을 염려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소망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고, 다른 것을 소망하며,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이것으로 그 구별됨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끝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끝,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주안에서 자는 자’라는 이 말이 여러분께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