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설교>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간섭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일은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세상에 함께 계시는 것으로 간주하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실에 선생님이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을 때의 학생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생님이 계실 때는 떠들고 놀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조용히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간섭하는 주체가 없고 눈치 보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눌려 있던 욕망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선생님이 계신 교실에 있는 학생처럼 삽니까? 아니면 선생님이 교실을 비우고 없는 상태의 학생처럼 자기 멋대로 삽니까?
신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만 예수님이 떠나고 없는 세상으로는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떠나고 없는 세상으로 여긴다면 비록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도 세상에서의 삶은 선생님이 교실을 비운 것처럼 자기 욕망대로 제 멋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도 세상을 여전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곳으로 여긴다면 그 삶은 예수님이 없이 사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신자의 삶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본문에 보면 사도는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권하는 사람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또 14절에 보면 게으른 자를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빛의 아들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사도가 말한 빛의 아들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을 따지기 전에 그렇게 살고 싶은 열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이 같은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은 이미 따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 우리가 계획하고 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공통적인 것은 내 자신에게 득이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삶을 계획하고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는 삶을 보십시오. 사도가 말한 대로 살면 과연 여러분께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권하는 사람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는 것이 여러분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14절과 15절에서 말씀하는 그 같은 삶을 모두 실천한다면 기쁨과 행복이 여러분께 넘칠 것이라고 기대하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산다고 해도, 그 같은 삶이 여러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가 말하는 삶에 대해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내게 보상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것을 남긴다고 해도 그것은 종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는데 열심히 장사를 한다고 해도 주인에게 잘 보일 수도 없고, 또 많이 남긴다고 해도 결국 모두 주인의 소유가 된다는 것 때문에 주인이 준 것으로 장사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사해서 남긴 두 종은 자신에게 돌아올 득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종의 위치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종의 위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뜻대로 사는 것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긴 것입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의 신자만이 본문의 삶에 깊은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어떤 득을 주느냐는 것은 빛에 속한 빛의 아들다운 생각이 아닙니다. 신자는 종으로써 오직 예수님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12,13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께 주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것을 목사라고 한다면 목사는 여러분께 어떤 존재입니까? 단지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신자는 말씀이 개입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께 목사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로써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말씀이 인도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 도움을 말씀으로 다스림 받고 권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을 목사가 하고 있다면, 신자에게 목사는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자신을 참된 복음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권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목사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신자는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이 내려진 채 예수 그리스도로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목사를 귀히 여기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로써 진심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돈보다도 말씀이 필요한 세상임을 알고 있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세상이 곧 어둠이고 밤이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실체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의 마지막도 안다는 것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자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의 길을 가게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말씀이 필요하고 소중할 뿐입니다. 그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게으르고 마음이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귀찮은 존재일 뿐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는 것도 여러분께는 귀찮은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권면하고 권계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는 힘 있는 사람을 사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타인의 힘을 이용해서 인생의 득을 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이웃은 자기 인생에 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게으르고 약하고 힘이 없는 자는 권면하고 붙들어 주며 오래 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에 속한 신자다움입니다.
15절을 보면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도 신자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신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삶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행한 것은 악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갚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나올 것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따라야 할 선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내어 놓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고 사랑이며 오래 참으심입니다. 또한 게으르고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고 권하신 은총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남은 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주신 것을 내어 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것은 감추어 두고 오직 내 자신을 위해서 제멋대로 산다면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며 살지만, 신자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