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9절에 보면 사도는 사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창조와 함께 세상에 등장한 존재입니다. 사탄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생명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이후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든 역사는 사탄을 언급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임한 저주와 죄는 사탄을 근거로 했을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식으로 죄를 해결하고 저주에 갇힌 자를 해방시키셨는가도 사탄을 근거로 했을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사탄이란 존재를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사탄을 추상적인 존재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사탄이 무엇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미혹되어 살아가면서도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합니다. 고작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못 가도록 방해하고, 기도를 못하도록 방해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자신에 대해 철저히 감추고 활동합니다. 인간이 선으로 여기는 것을 이용하여 악으로 이끌어 갑니다. 선에 악을 감추고 선으로 가장하여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사탄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로 유혹합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존귀한 존재, 강한 존재, 영광된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신의 존귀함과 강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사탄에게 장악된 인간의 실체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무엇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고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칩니까? 모두가 자신의 존귀와 영광과 강한 힘을 얻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여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활동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그것이 곧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삶에 만족이 없는 것 또한 인간의 원하는 인생의 목적에 미치지 못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불만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을 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탄의 존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가 신앙으로 내세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것이 사탄에게 장악되어 나타나는 죄라는 것을 누가 인정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나,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들이 사실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9,10절을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활동을 따라 악한 자가 나타납니다. 악한 자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수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악한 자가 보여주는 능력과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누가 봐도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할만한 놀라운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능력과 표적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 사탄의 활동이며,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미혹을 따라 보이는 것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신 이유는 누가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가 사탄의 활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을 허용하고 계신 이유입니다.
진리의 사랑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주에 갇힌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는 그 피를 믿음으로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놀라운 기적이 믿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은 신자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을 능력이나 표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이 참된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신자에게는 십자가 사건만이 표적이고 참된 기적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기적이 아닙니다. 병이 고침 받은 사람도 결국은 죽지만 십자가 안에서 신자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능력과 표적으로 여기고 참된 기적이라고 고백하는 그가 진리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보다 사랑이 더 크고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곧 십자가로 증거된 진리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믿는 신자는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표적이 있다는 것에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11,12절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에 따르면 세상이 거짓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심으로써 세상이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나타나 불의를 행하고 거짓된 말로 세상을 미혹해도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보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표적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악한 자의 거짓된 말을 따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한 자의 활동으로 세상이 불의와 거짓 된 것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진리의 사랑을 받았다면 관심은 자연히 십자가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에 갇힌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고 그 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사랑을 받은 신자입니다.
진리의 사랑 아래서는 나의 존귀와 영광과 힘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존귀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 존귀하고 그 은혜를 받은 것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영광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사랑을 받은 신자의 눈에는 자신의 존귀와 영광과 세상에서의 힘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악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이 여전히 자신에게 있고, 자신을 충동질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단 한 순간도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지옥 보낼 자는 지옥으로 보내시고 천국 보낼 자는 천국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 기적 아래서 신자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삶으로부터 초월이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는 이 같은 믿음의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능력과 표적을 체험하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리의 사랑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덮쳐온 신자로써 그 사랑에 붙들려 살기를 소원한다면 이미 거짓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